공항, 덧대어진 의식에 가려졌던 진짜 그리움을 만나는 곳
예정된 이별
우리의 떠남은 그가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남편이 석사 과정에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1년여 남짓의 시간은, 계획만 했을 뿐 언제 어디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참으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걷는 것과 같은 시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그러할 진대 이미 반쯤 마음이 뜬 상태로 아침마다 출근길을 나섰던 남편의 마음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1년이 10년 같았던 무기력한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우리 가족의 새로운 삶의 터가 될 곳이 정해졌다. 가야 할 곳, 떠날 시기, 불투명했던 모든 것이 정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고구마 백만 개 먹은 것처럼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린 듯, 속 시원히 살림을 정리하고 다가올 앞날을 그리며 새로운 기대로 잔뜩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진짜 떠남'이 현실로 다가왔다. 유학 생활을 통해 삶의 터전을 떠나는 경험을 적잖이 해왔기에 일단 비행기 뜨고 나면 훌쩍 멀어지는 느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결혼하고 바로 아이를 갖고 일 년 만에 아이 엄마가 된 폭풍같이 몰아치는 변화의 시간을 겪으며 몇 년간 거의 만나지 못했던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리며 적어도 이 땅에 발 붙이고 있는 동안 이 헤어짐을 계기로 지난 아쉬움을 달래고자 야심찬 작별 계획을 세웠더랬다.
쫑파티는 끝났다?!
두 돌 반이 되어가는 딸내미는 유독 낯가림이 너무 심해서 누굴 집에 초대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친정 엄마 외에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던 아이를 누군가에 맡기고 외출하는 것 또한 불가한 지난 2년이었다. 그 와중에 신혼살림을 통째로 싸서 미리 보내고 출국일까지 남은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시댁에서 생활하기로 했던 터라 나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쫑파티 따위는 애초부터 야무진 꿈이었다. 이 또한 내가 선택했기에 감당해야 할 삶의 변화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했던 나에게 예정에 없던 쫑파티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시가의 고질병인 일가 친적들과의 인사치레였다.
누구를 위한 세리머니인가..?
본디 나의 시가는 만남이 잦고 말이 많다. 좋을 때는 '정이 많고 사랑이 많다'라고 표현할 수 있고 안 좋을 때는 '피곤하고 형식적인 오지랍이 넘치는' 가족이다. 졸지에 시댁과 합가하게 된 '갑작스럽지만' 천만다행으로 '기약 있는' 동거만으로도 이미 이 새로운 출발의 시작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첨에는 아쉬운 마음에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이 왜 애틋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아쉬움이 모든 이별의 과정을 아름답게 기억하기엔 부족했는가보다. 우리가 무슨 죽으러 가는 사람들인가, 요즘 세상에 다시 못 볼 것처럼 옛 추억을 곱씹고 나누기를 반복하며 난 이 가족들 간의 이별 세레머니 퍼레이드가 점점 안 내키기 시작했다.
이 집(나의 시댁) 막내아들, 어느새 장성해 결혼하고 아이 낳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소개했을 때 짜잔 하고 등장하는 장면을 위해 나와 나의 울보 딸은 꼭 예민해지는 밥때에 맞춰 단장을 하고 준비하고 지독한 교통 체증을 견디며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갔다. 누구를 만나는지 왜 만나는지도 알지 못하는 애를 굳이 그분들 눈에 나지 않게(사실상 아무도 관심 없음) 단장시켜서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들이밀며 '어이구, 니가 누구 딸이구나'라는 인사를 듣고 나면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게 끝. 그때부터 이어지는 그들만의 추억 잔치가 언제 끝나나 기다리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누가 말이라도 걸면 바보처럼 베시시 웃고, 애가 징징거리면 데리고 나가 주변을 거닐며 광고주 회식자리에 낀 대행사 말단 사원보다 더 뻘줌한 시간을, 그 와중에 어르신들에게 낮술을 따라드리며 흡족한 본인 엄마 미소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들인 나의 남편을 보며 속을 삭혔다. 웬만큼 취하신 거 같고 이제 끝났나 싶을 즈음 인사하는 와중에 느닷업이 '한번 안아보자' 하니 지칠 대로 지친 꼬맹이는 질색을 한다. 불편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나에게 세리머니의 주인공인 남편은 당연한 그들의 문화를 나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참으로 무던히도 애를 썼다. 인정. 그러나 이제와 말이지만 그때 그는 그 노력을 나를 이해시키기보다 어차피 이해 못하는 나의 불편함에 공감하며 들어주어야 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아.. 이쯤에서 글이 딴 길로 샐 것 같다) 여튼, 그렇게 떠나는 '며느리' 노릇하느라 몇번 남지도 않은 금쪽같은 주말을 다 써버리고 떠나는 '나'의 마음은 돌아보지도 못한 채 한 달이 훌쩍 가버렸다.
헤어짐의 날
개통 10년 만에 '오늘 그냥 공항에서 살래요' 할 만큼 다양한 많은 시설을 갖춘 첨단 도시가 된듯한 인천 신공항. '와.. 공항 좋아졌네' 하며 낮 비행기 시간에 맞춰 여유롭게 도착한 우리는 신공항의 신문물을 만끽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곤쥬와 열 살 가까이 터울이 있고 외동이라 받는 것에만 익숙해 사촌 동생이라 봐야 만날 때마다 한 번 들여다 볼뿐 별다른 교류가 없던 초딩 3학년의 조카와 진짜 안 친했던 큰 시누, 그리고 그날따라 유독 말씀이 없으셨던 시부모님과 함께 밥 먹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고, "모두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가서 애쓰고, 곤쥬가 힘들어 어쩌누...", 녹음기처럼 한 말을 하고 또 하며 게이트 앞까지 걸어왔다
진짜 세리머니는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게이트 앞에서 선 조카가 말해다.
"언니 한번 안아줘"
데면데면하기 짝이 없던 곤쥬는 웬일로 언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덥석 안겼다.
꼬맹이 빼고 모두 울었다.
헤어진다는 건 그런 거다.
지금이 무슨 전쟁통인가, 우리가 집안이 망해 도망가는 것인가, 이게 웬 청승인가.
우린 변함없는 가족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할 거고 언제가 되든 다시 만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의 세리머니에 가려졌던 수많은 일상의 기억들, 퇴근길에 불쑥 나타나 밥 먹고, 주말에 갈 데 없다고 가서 뭉개고 장난치고, 싸우고 울고 위로받고 함께했던 짧지만 소중했던 일상의 순간은, 더 이상 공유할 수 있는 '우리' 것이 아닐 것이라는 거.
결혼하고 아이 낳고 닥친 인생 살다 보니 아무리 허구헌날 함께 눈물을 같아 마셨던 자매 같은 친구라도, 심지어 나의 유전적인 자매와도 같은 땅 아래 살면서도 일 년에 한두 번, 혹은 분기에 한번 만나기도 쉽지 않은게 현실이다. 방학 때마다 나오던 유학 시절엔 습관 같은 이 헤어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언제 보자...'라고 딱히 기약할 수 없는 지금의 이 헤어짐엔 우리가 건너뛸 그 세월의 순간들이 말할 수 없이 아쉽다.
2011. 7월
지난 세월의 시작인 이 헤어짐의 순간을 쓰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너무나 생생하지만 그 날의 아쉬움을 남긴 그대로 쓰기엔 오랜 세월 동안 너무나 복잡하게 쌓인 여러 감정이 자꾸만 더해져 그날의 기억을 그때 그 마음으로 남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가족 간(?)의 사랑과 애틋함도 지나온 세월만큼 멀어진 관계로 퇴색되고 멀어져왔다. 그러나 10년 전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지금만큼은 그날 공항에서 마주했던 우리가 맞딱드릴 그리움을 그대로 쓴다.
헤어짐을 앞둔 그 날의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