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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Jan 26. 2021

첫날밤의 기억

혼자가 아니었던 시작

@Hancock Int'l Airport, Syracuse, NY

이민 가방 4개와 카시트, 유모차, 캐리어 3개에 가득 실은 짐들.

총 9개의 짐을 두 카트에 나눠 싣고 꼬박 14시간을 날아와 뉴욕 공항에 도착했다. 장거리 비행은 처음인 두 돌 반 꼬맹이가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이니 비행시간 내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르겠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한 나와는 달리 꼬맹이는 다행히도 잘 먹고 잘 자고 비교적 편안하게 도착했지만 생각보다 *환승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게 아닌가. 

*뉴욕-시라큐스는 250마일 정도로 비행기로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지만 환승 편이 많지 않아 너무 촉박하거나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가까운 국제공항으로 입국하기보다는 환승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시카고나 다른 도시의 직항 편을 이용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카트 두 개에 짐을 나누어 실고 메고 밀고, 특히나 낯선 곳에서는 좀처럼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던 곤쥬도 웬일로 카트에 매달린 채 빛의 속도로 달려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했다. 여담이지만 갈수록 국내선 비행기 이용 조건이 아주 까다로워져서 짐가방 하나당 추가 요금이 붙는다. 애초에 서울-시라큐스로 티켓팅을 하고 중간에 환승이 있었다면 국제선 요금에 포함이 되었겠지만 우리는 서울-뉴욕으로 티켓팅을 하고 뉴욕-시라큐스 편도를 추가 구매한 터라 빼박으로 바가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괜한 시비 붙었다가 비행기 놓치면 야밤에 낯선 땅에서 세 식구가 잘 곳을 찾아 밤새 헤매게 될 일,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었다. 그 많은 짐에 하나하나 그것도 초과 무게만큼 추가 비용을 붙였으니 돈을 길바닥에 깔고 갔다는 말 그대로 웬만한 비행기표 한 장은 족히 나왔을 값비싼 환승 편에 무사 탑승했다.


긴장한 탓인지 탑승하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자다 깨다 한 비행 후 한여름 나시 한 장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미친 듯이 뛰었으니 옆에서 칭얼거리는 곤쥬를 잠결에 달래며 12시가 넘어 시라큐스 공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녹초가 되었다. 어마 무시한 짐들과 뒤죽박죽 된 시차로 헤롱대는 아이를 또다시 밀고 메고 렌터카 주차장까지 셔틀로 이동하고 렌터카가 나오길 기다렸다. 정신없이 피곤한 와중에 아이와 함께했던 가장 빡센 여행 중 하나로 기억될 거 같다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가 겪어내야 할 폭풍 같은 세월의 첫 시작이었다.


다행히 세상이 좋아져 해외에 도착하는 순간 통신 두절되는 일은 옛 일, 한국에서 미리 개통해 온  T-mobile로 바로 핸드폰 내비게이션을 따라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캠퍼스 타운의 학교 주변엔 긴 여름 방학 동안 비워둘 집의 렌트비를 충당하기 위해 단기간 sublet으로 빌려주는 집들이 꽤 있다. 가뜩이나 낯선 환경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호텔 생활은 식사부터, 빨래, 모든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으니 비용도 절감할 겸 인터넷 학교 카페에서 만난 박사 과정에 있는 한국 여자분의 아파트를 빌렸다. 반지하에 스튜디오라 마루에는 침대만 덜렁 있고 식기라 할만한 것도 거의 없어서 아이와 지내기에 편치는 않았지만 며칠 있다가 곧 집을 구해 나갈 예정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첫날밤. 

몸은 피곤해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막상 자리에 누우니 잠이 오질 않는다.

반지하 특유의 축축한 곰팡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낯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머리 위쪽으로 난 조그만 창을 밤새 두드리는 후두둑 빗소리가 요란하다.

이젠 정말 우리 셋. 

이제야 이 크고 낯선 땅에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


문득 10년도 더 지난 98년 6월의 밤이 생각난다. 혼자 여행도 해 본 적 없던 세상 물정 몰랐던 스무 살의 내가 혼자 보스턴에 도착해 기숙사에 들어갔던 날. 요즘 애들이야 한국에서 영유(영어유치원)를 다녀 미국에서 온 애들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경우가 수두룩 하지만 아무 준비 없이 유학 왔던 나에게 영어라고는 중고딩 입시 영어 외에 입 떼본 적이 있을 리 없다. 룸메이트가 손짓 발짓으로 알려준 내 침대에 이민 가방에 꾸역꾸역 싸들고 온 얄파닥한 홑이불 한 장 깔고 누워 두렴과 낯섬으로 밤새 뒤척였던 스무살의 그 밤이 왜 생각나는 것일까. 

유학생도 아닌 이민자도 아닌 유학생의 와이프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아가게 될 이 곳. 썸머 타임이 시행중이라서 더 일찍 찾아온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 벌써부터 찡찡 소리를 내며 투정을 부릴 준비를 하는 딸램이를 보니 오늘도 긴 하루가 예상된다. 낯선 이 땅에서 혼자라 두려웠지만 동시에 혼자라서 무엇이든 부딪혀 볼 수 있었던 그 때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나, 셋이라는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셋이라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로 시작해본다.


- 2011년 7월 15일 새벽. 동트는 빈지하 방에서의 메모




지금도 종종 남편과 시라큐스에서의 그 첫날밤을 이야기한다.

그때는 정신 바짝 차리고 네비만 따라 가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고속도로에서 exit으로 나오자마자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그 작은 타운하우스의 입구는 훤한 대낮에도 동네 사람이 아니면 놓치기 십상인 아주 애매한 위치였다. 그 깜깜한 밤에 익숙하지도 않은 렌터카로 초행길을 가던 우리에게 마치 누가 미리 조명 장치라도 해둔 것처럼 그 입구가 눈에 확 띄었던 건 기적이었다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 119:105)

좁디좁은 숲길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에게 누군가 안내하듯 비추어진 한줄기 빛처럼,

혹시 발을 헛디딜까 내 발밑을 비추는 호롱불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시작을 섬세하게 인도해주셨다.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던 그 밤 나에게 찾아온 위로는 남편과 딸과 함께여서가 아니라 그때는 알지 못했던 그분의 임재가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막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고 불구덩에라도 뛰어들 듯 뜨거운 마음으로 미국에 도착한 나의 신앙도 10년이 지나는 동안 오르락과 내리막을 지나며 들쭉날쭉한 나의 삶처럼 펄펄 끓었다, 차갑게 식었다, 휙 내던졌다 다시 주워 담기를 반복해왔다. 신앙은 과거의 추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고 했던가. 돌아갈 곳은 그곳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만 외면하고 싶을 때면 그날 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기억은 넘어져 있는 현재의 나를 일으켜주는 위로이자 다짐이자 질책이며 격려로 다가와 다시금 일어나는 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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