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dew Feb 01. 2022

유채 김치를 아시나요?

맛있으면 많이 먹어

남편이 박사 과정을 시작해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가뜩이나 낯선 환경에서 불과 두어 달만에 달랑 두 개 밖에 없던 한인 교회 중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우리가 교회를 옮기에 된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갓 이사 온 가정이 좁아터진 시골 교민 사회에서 구설에 오른다는 건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었다. 다른 초이스가 없으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새로운 교회에 발을 붙일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어찌나 조심스럽고 눈치가 보였는지 모른다. 누군가 다가오면 괜히 ‘이번에 옮겨온 그 집’이라는 낙인이 찍힌 게 아닐까 움츠러들고 이것저것 따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섣불리 멀 물어보기도 조심스러워 잔뜩 몸을 낮추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전에 있던 큰 교회 (그래 봤자 200-300명 정도의 등록 교인이 있는 수준)에 비하면 새 교회는 턱없이 작은 인원인 40-80명 정도의 교인이 있는 가족 교회였다. 작지만 따뜻한 분위기에 마음이 닿았고 사실 안 닿은들 갈 곳이 없기도 했지만 일단 한 두달 그곳에서 예배를 드릴 생각이었다.

구역이라 봐야 한두 구역쯤 되나? 내가 어느 구역에 속해 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 불러줄 곳도 부를 사람도 없는 곳에서 안면 정도 겨우 있던 아무개 집사님의 초대를 받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4살 딸내미와 돌도 안 된 둘째와 함께였던 우리 네 식구가 찾아갔다.


초대를 해주신 아무개 집사님은 남편분과 함께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하시고 한국에서 학교에 취업해 사시다가 아내 분만 장성한 (중딩)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유학생 출신 시골 기러기 가정이었다. 엄마와 남매 둘이 사는데 집이 클 이유가 없고 아마도 살림도 그닥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셨던 것 같다. 2 베드 작은 아파트에 그저 학생 가구 살림살이가 전부지만 고만고만한 유학생 가정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경계가 만들어지는 겉모습 같은 건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순수한 마음으로 집을 열어 주셨다. 학생 타운에서 초대하는 사람이 pot lock(호스트가 모든 걸 준비하는 게 아니고 초대받은 사람들이 각자 한 dish 만큼을 음식을 준비해서 함께 나누는 것)은 결코 무례하거나 성의 없는 것이 아니다. 교제하고 싶고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여건이 안 되는 경우의 합리적인 선택이기에 가장 흔한 형태의 모임이었고 나 또한 작은 정성으로 한 가지 음식을 해갔다.


유학생 와이프에게 가장 진수성찬은 어떤 메뉴를 떠나 “내가 하지 않은 한국 음식”이다. 가끔 솜씨 좋은 권사님 댁에 초대받아 집밥으로 가능할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깊은 고향의 맛을 누리는 일은 유학 생활의 꽤 의미 있는 힐링의 시간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간단한 샌드위치나 떡볶이 정도를 기대하는 pot lock이라고 해도 반드시 누군가는 제육, 불고기 등 훌륭한 메인 요리, 때로는 가정식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듣보캡숑(올드한 감탄사에 용서를 구함) 중국 요리뿐 아니라 보쌈과 족발 등의 별미까지 초호화 뷔페가 펼쳐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 사실 교회 모임은 말씀을 나누는 귀보다 입이 먼저 즐거워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이 무슨 80년대 이민 시대가 아니고 사실 요즘에는 어지간한 시골도 김치 못 구하는 곳은 없으니 팟락에 김치를 해오는 경우는 없는 편인데 그날따라 못 보던 김치가 있었다. 생긴 건 갓김치 같아서 가져오지 않았는데(개인적으로 갓김치의 쓴맛을 좋아하지 않음) 남편이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해서 한입 집어 먹어봤는데,,,,?


으허허허응? 이거 모야????


먼가 아삭하고 시원한 맛.

쓴맛은 전~혀, 오히려 살짝 달찌근하면서도 상큼한 맛이랄까? 여튼 그런 김치는 처음 먹어봤다. 입이 짧은 편이라서 뷔페를 가도 한 접시 이상은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모임마다 해오기만 하고 축내지는 않는 환영받는 참석자였다.(물론 아주매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다. 당연히 모든 호스트는 손님이 싹싹 비워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런 내가 김치만 한 서너 번을 가따 먹었나 도대체 이게 머냐며 물어보던 나에게 유채라고 하셔서, '유채?', '유채라고는 제주도에 핀다는 유채꽃밖에 못 들어봤는데, 그게 이 유챈가?’ 속으로 웅얼거리며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세 식구 살면서 별미 김치는 얼마 안 담그셨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곤쥬 엄마 이거 좋아하나 봐” 하면서 자꾸 가따주셨다. 그리고 그날 나는 여태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못하고 조심스럽기만 했던 새 교회 사람들에게 마음을 홀랑 열어버렸다. (차마 김치 때문에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지난 시절, 그리운 시절에 대한 아쉬움인지,

당신의 부족한 마음 어디 한 군데를 베풂으로 채우고 싶은 마음인지 모르지만

그건 분명 사랑의 한 모습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은 반드시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어딘가에 뿌려진 씨앗이 된다.


남편이 5년의 박사 과정을 끝내고 이곳에 정착한지도 4년 차이니 살림 초보였던 나는 시골 생활 10년 만에 족발 정도는 뚝딱 해내는 미세스 장금이 되었다. 그리고 모임이 있는 날 일주일 전에는 어김없이 중국 마트에 가서 yu-choy라고 쓰인 유채를 한 다발 사 온다. 메인 요리에 뒷전이었던 유채 김치를 한 입 먹어보고는  “ 이거 갓김치예요? 완전 맛있다~~~” 하면서 감탄을 연발하는 젊은 새댁들을 보면 오래전 아무개 집사님처럼 “맛있으면 많이 먹어” 라며 한 움큼씩 싸주곤 했다.




나에게 저런 넉넉한 마음이 자라던 시절이 있었다.


양측 변호사가 개입하면서 하나라도 더 내 것을 지키려고 치열하게 싸워온 지난 몇 달간,

누구도 얻은 게 없이 점점 바닥으로 서로를 끌어내리는 동안

살림은 엉망이고, 주변 모든 관계는 단절되었고, 유채 김치 담글 일도 없어진 지 오래다.


며칠 전 코스코에서 산 종갓집 김치(불과 몇 년 만에 코스코에 종갓집 김치가 들어왔다. 이 와중에 자랑스런 한국인) 하나 덜렁 들어있는 냉장고를 보니,


문득 서글픈 마음이 확 밀려온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직접 담근 김치 한쪽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던 내가 10년을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온 사람과 서로를 물어 뜯으며 싸우고 있으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 시절의 사랑이, 그 시절의 나눔이 그리운가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날밤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