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dew Mar 31. 2022

미국 도착 3일째, 모든 것이 꼬이다

3일, 30일, 300일,,,희망을 이어붙이기

요즘에야 핸드폰 카메라가 웬만한 DSLR보다 잘 나온다고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멋진 풍경을 찍으려면 DSLR는 필수였다.

그러나 제 아무리 똥손이 똥카메라로 찍어도 보정이 필요 없는 게 바로 쨍한 셀룰리안 블루빛 미국 하늘이다.

영화 속 앤디가 입은 스웨터
셀룰리안 블루 –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에서 처음 면접을 보러 간 앤디(앤 해서웨이 분)에게 미란다(메릴 스트립 분)가 네가 입고 있는 블루가 어떤 블루인지 아냐고 물었던 바로 그 블루.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실적인 풍경화에서의 하늘색은 대부분 회색에 가까운 희미한 하늘색과 회색의 중간 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하늘색인 하늘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시차로 인해 새벽(사실상 오밤중)부터 일어나 잠을 설치고 해가 뜰 때까지 두어 시간을 버티다가 슬슬 보챌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꼬맹이를 델꼬 밖으로 나왔다.

밤새 내린 비로 아직 물기를 머금은 맑고 쨍한 하늘.

코딱지 만한 스튜디오의 침대 위에서 뒹구는 동안 갑갑하게 느껴졌던 마음에 비친 감격적인 푸른빛은 희망찬 새 출발을 선사하는 듯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처럼 이라고 하면 좀 과한 듯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 앞에 저 하늘빛처럼 쨍한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 기대 말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시간은 참으로 지독히… 지독히도 안 갔다.


남편은 본격적으로 은행, 집, 면허, 차, 학교,, 알아봐야 하는 일들로 컴터 속으로 들어갈 기세였고 혼자 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곤쥬는 아~~~무것도 없는 원룸에 앉아 엄마를 들들 볶는 거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후에 되면서 한낮의 온도가 30도가 넘어가니 7월 중순의 쨍한 햇살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고 폭염과 컨디션 난조로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오후 3시의 나는 이미 일어난 지 12시간이 넘었다.


도착하면 바로 은행 가서 계좌를 열고 집을 보러 다니고 면허를 신청하고 차부터 살 줄 알았는데,

1. 은행: 9.11 사태로 인해 외국인에 대한 검열이 말도 안 되게 까다로워진 미국은 소셜 넘버가 없고 크레딧이 없는 우리에게 계좌를 열어주지 않았다. 멘붕… 남편이 학교에 소셜 넘버를 신청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학기는 9월에나 시작하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2. 집: 7월 중순은 rent이던 구매이던 집을 구하기엔 늦은 시즌이었다. 우린 둘 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녀서 이사도 꽤 해봤고 집 구하는 일은 정말 쉽게 생각했는데 학생 혼자 살 원룸을 구하는 것과 가족이 살만한 살림집을 구하는 일은 완전 다른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매물이 없었고 부동산 전화해서 보러 갈 일만 남은 줄 알았던 우리는 이제와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를 집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바로 집 구해 들어갈 거라서 일주일만 빌렸던 이 집이 천만다행으로 여름 방학 동안 비어 있어서 기간을 연장해 준다는 건 이 와중에 유일하게 기쁜 소식이었다.

보기만 해도 고구마 백만개 먹는 장면

3. 면허: 영화, 주토피아(Zootopia,2016)를 본 사람들은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에 찾아간 주디가 나무늘보를 만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바빠 죽겠는 와중에 느릿~느릿~~ 아~무 의욕도 책임감도 없는 공무원의 모습을 비판한다고 했지만 수많은  공무원 중 DMV를 택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DMV 한번 가려면 반나절은 날린다고 생각하고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이 서류가 없다, 담에는 저 서류가 없다, 저번엔 그럼 왜 말 안했냐, 그건 모른다, 다른 데 가봐라, 영혼 없는 'I’m sorry but it’s not my fault', 그리고 다시 시작을 최소 10번은 반복한 듯,,, 결국 남편은 거의 한 달 만에, 나는 dependent의 신분이라 더 까다로워서 거의 두 달 만에 받았던 거 같다. 미국에 산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DMV를 생각하면 일단 욕나옴.#$%^*&*


4. 차… 차는 계좌를 못 만드는 바람에 그림의 떡이 되었다. 유학생은 송금 절차가 엄청 까다롭다. 일단 계좌를 만들지 않으면 사실상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은행이 해결될 때까지 차는 무기한 보류. 덕분에 2~3일이면 반납하게 될 줄 알았던 렌터카를 한 달도 넘게 타게 됐고 이래저래 일이 꼬인다는 건 그만큼의 쌩돈이 날아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내 희망엔 시커멓게 내려온 다크서클처럼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새벽에 깨서 보채는 곤쥬를 달래다가 급기야 곤쥬보다 더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언제까지 이 집에 있어야 해…. 흐헝엉엉엉ㅠㅠㅠㅠ


질질 짜는 엄마와 찡찡거리던 딸은 한바탕 울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또다시 쨍한 하늘 아래, 넘치는 에너지를 뿜어내는 딸램과 한바탕 뛰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나 보다.


이 모든 과정에서 누구 하나 아픈 사람 없었고

태풍이나 폭염 등 천재지변 없었으며

남편도 나도 지쳤지만 서로를 탓하지 않았기에 

예상치 못한 변수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었으니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미리 걱정을 사서 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막연히 우리의 의지라기보다는 주어진 삶을 따라온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을까.

어차피 일어날 꼬맹이를 붙잡고 우느니 새벽마다 달리기를 하자, 

어차피 깨워서 울고불고하느니 푹 재우고 늦게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3시 반에 일어났던 꼬맹인 오늘은 4시 반에 일어났으니 곧 5시, 6시에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이 보였고 왠지 이곳에서 잘해갈 수 있을 거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엄마로서, 주부로서 8년 만에 다시 시작한 미국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장점은,

오로지 분리수거의 수고로움이 없고 disposal로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지만

점점 더 많은 장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앞으로 또 3일, 그 담엔 한 달, 3개월, 3년,,, 그렇게 새 삶을 맞아보리라.


물론 새벽마다 등장하는 나의 이국적인 썬캡은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차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자외선으로 내 피부를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었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채 김치를 아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