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달리고 싶다

말띠의 꿈

by sandew
살다 보면 그런 거지 우후 말은 되지
모두들의 잘못인가 난 모두를 알고 있지 닥쳐
노래하면 잊히나 사랑하면 사랑받나
돈 많으면 성공하나 차 있으면 빨리 가지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
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 놈이 될 순 없어 말 달리자
말 달리자 말 달리자 말 달리자 말 달리자
이러다가 늙는 거지 그땔위해 일해야 해
모든 것은 막혀있어 우리에겐 힘이 없지 닥쳐
사랑은 어려운 거야 복잡하고 예쁜 거지
잊으려면 잊힐까 상처받기 쉬운 거야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가만있어
우리는 달려야 해 거짓에 싸워야 해 말 달리자
말 달리자 말 달리자 말 달리자 말 달리자
이리 띵굴띵굴한 지구 상에서 우리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달리는 것뿐이다 무얼 더 바라랴
어이 이봐 거기 숨어 있는 친구 이리 나오라구
우리는 친구
(크라잉넛 정규 1집, 1998)

어른들의 음악

크라잉넛을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비교적 가깝게 지내던 친구를 통해서였다.

여느 고등학생 같지 않은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친구는 분명 흔한 강남 날라리들과는 좀 달랐다. 얼핏 보면 차분한 모범생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어딘가 쎄~~ 한, 혹은 쎅~~ 한 느낌을 준달까? 아주 이쁘거나 귀티가 나거나 늘씬하거나 눈에 띄는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아무튼 풍기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었다.

학교에서 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것도 단순히 내성적이어서라기보다는 일반인들과는 약간 수준이 안 맞는다는 느낌? 여자애들끼리 세상 중대 뉴스를 대하듯 옆반 인기남에 대한 열변을 토할 때면 마치 이 유치한 고딩들…이라는 뉘앙스로 무심하게 대꾸했고 그럴 때면 쟤 머야 하면서도 쟤 먼가? 호기심이 생기곤 했다.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니 종종 자신의 고차원적인 취미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하교 후에는 홍대 인근의 인디 클럽을 찾아 밤새 흥과 끼를 발산하는 이 도도한 아가씨의 삶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당시 나에겐 (그 친구가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그 신비로운 세계가 꽤나 쿨하고 비밀스러운 어른의 세계처럼 들렸다.

무엇보다 그녀 특유의 잘난 척을 섞은 발음의 크라잉넛이라는 이름은 홍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조차 매우 홍대스럽게 들렸고 특히나 드럼이자 보컬이었던 이상혁에 대한 그 친구의 찬사는 거의 숭배에 가까웠다. 전 국민이 GV2를 입던 시절 리바이스가 잘 어울리는 남자라는 표현은 마치 트렌드나 따르는 촌 것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클래시컬한 느낌이었다.


여하튼 96년 이미 발표되어 인디 밴드들 사이에서는 알려져 있었으나 (난 그 당시 음악에 대해서 개뿔도 모른다. 다 주워들은 소리니 틀려도 넘어가 주세요) 98년 정식 앨범에 수록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이 노래는 그녀의 최애곡이었고 난 홍대 클럽에서 유명하다는 그룹 하나 알고 있는 게 꽤 쿨해 보여서 덩달아 이 노래를 즐겨 들었다.


달리다 만 추억

두두두두두두 말~~~~ 달.리.자. 마알~~~~달.리.자….!!!

발을 구르며 달려 나가는 말처럼 신나게 지르다 보면 내가 홍대 클럽 춤추는 쿨녀가 되고, 눈앞에 닥친 입시 따위 닥쳐~라고 외치는 시대의 구원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늘 열망은 있지만 정작 울타리를 벗어날 용기가 부족한 나에게 그녀의 쿨한 세상 이야기는 점점 부담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녀와 멀어지면서 인디 밴드들의 음악과도 그랬다. 내가 학창 시절 라디오에서 즐겨 듣던 변진섭과 이승환의 발라드와는 너무나 결이 다른 저 노래가 애창곡 중 하나로 남았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를 가진 채로 말이다.




crying nut.jpg oil on canvas, 20*16, "driving at dawn"


미지의 2022년

1996년, 소심하게 말 달리자를 읊조리던 소녀는 이제 진짜 미지의 세계인 2022년을 살고 있다.

그리고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밤길을 달리다 보면

종종 이 노래가 생각난다.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말들어

으어아아아아 아~~~(노래방에서 무아지경에 이르는 순간)

멈출 수 없는 인생이면 달려보자.

가보자 닥치고 가보자.

난 말띠니까 이랴이랴 막이러면서 벽 뚫고 뛰어나고픈

소심한 일탈을 꿈꾸던 아줌마의 마음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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