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합니다 #1
감정을 드러내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화를 참지 못하는 선생님, 우울감을 숨기지 못하는 친구, 작은 자극에도 화들짝 놀라는 엄마. 좀만 참으면 되는데. 숨기려고 노력하면 그렇게 슬퍼 보이지도 않을 텐데. 왜 그러지 못하는지 의아했다.
나는 늘 웃고 다녔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 가장 친한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묘사했다. 나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고 말하는 남자도,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들도 내가 밝아서 좋다고 했다. 순간적인 감정을 숨기고 사는 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감정을 숨기는 건 내 특기였다.
지금은 그렇게 잘 못하겠다. 애써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게 힘들다. 그렇다고 늘 화를 내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건 아니다. 내가 숨길 수 없는 건 무력감이다. 나는 땅만 보고 걷는다. 허공을 바라보고 이따금씩 한숨을 쉰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대답한다. 예전에는 이마저도 누가 보면 내 생각을 알아챌까 금방 거두곤 했던 행동이다. 나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정말 그렇게 하면 그게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 되어버릴까 봐. 나조차도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는 일, 그게 진짜 내가 해왔던 방식이 아녔을까 생각한다.
요즘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누리면서 행복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나는 애인도, 내 집도, 직장도 없었다. 이 세 가지는 그때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었고 3년에 걸쳐 모든 걸 얻었다. 하지만 길고 깊은 연애도, 따뜻하고 넓은 집도, 적당히 일하면 적당한 보수를 주는 일도 모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너무 쉽게 얻어서일까?) 여전히 나는 한 사람, 공간, 일에 정착하는 게 힘든 사람이다. 행복에 겨웠던 시간에도 어쩌면 나는 지금과 같은 무력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냥 이제는 숨길 수 없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직 화도 안 나고 우울감을 얼굴에 쓰고 다닐 만큼 슬프지도 않다. 아직도 나를 속이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언젠가 그마저도 벗어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다. 올 거라는 걸 직감한다.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던 것들이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참지 못하고 모든 걸 내려놓고 언젠가 아무것도 없는 자가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게 되겠지.
그래서 요즘에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 생각을 자주 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길래 쉽사리 숨겨지지 않는 감정들을 품고 살게 된 걸까. 나도 곧 그렇게 될까. 오만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무력감과 두려움이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