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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나라 Oct 20. 2021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

무력합니다 #1

감정을 드러내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화를 참지 못하는 선생님, 우울감을 숨기지 못하는 친구, 작은 자극에도 화들짝 놀라는 엄마. 좀만 참으면 되는데. 숨기려고 노력하면 그렇게 슬퍼 보이지도 않을 텐데. 왜 그러지 못하는지 의아했다.


나는 늘 웃고 다녔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 가장 친한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묘사했다. 나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고 말하는 남자도,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들도 내가 밝아서 좋다고 했다. 순간적인 감정을 숨기고 사는 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감정을 숨기는 건 내 특기였다.


지금은 그렇게  못하겠다. 애써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힘들다.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아니다. 내가 숨길  없는  무력감이다. 나는 땅만 보고 걷는다. 허공을 바라보고 이따금씩 한숨을 쉰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대답한다. 예전에는 이마저도 누가 보면  생각을 알아챌까 금방 거두곤 했던 행동이다. 나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정말 그렇게 하면 그게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 되어버릴까 . 나조차도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는 , 그게 진짜 내가 해왔던 방식이 아녔을까 생각한다.


요즘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누리면서 행복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나는 애인도, 내 집도, 직장도 없었다. 이 세 가지는 그때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었고 3년에 걸쳐 모든 걸 얻었다. 하지만 길고 깊은 연애도, 따뜻하고 넓은 집도, 적당히 일하면 적당한 보수를 주는 일도 모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너무 쉽게 얻어서일까?) 여전히 나는 한 사람, 공간, 일에 정착하는 게 힘든 사람이다. 행복에 겨웠던 시간에도 어쩌면 나는 지금과 같은 무력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냥 이제는 숨길 수 없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직 화도 안 나고 우울감을 얼굴에 쓰고 다닐 만큼 슬프지도 않다. 아직도 나를 속이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언젠가 그마저도 벗어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다. 올 거라는 걸 직감한다.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던 것들이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참지 못하고 모든 걸 내려놓고 언젠가 아무것도 없는 자가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게 되겠지.


그래서 요즘에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 생각을 자주 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길래 쉽사리 숨겨지지 않는 감정들을 품고 살게 된 걸까. 나도 곧 그렇게 될까. 오만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무력감과 두려움이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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