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는 흔한 이야기이다. 평범하지만 어딘가 유별난 구석이 있는 십 대 소녀. 이름도, 고향도, 가족도 마음에 차지 않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애와 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소녀의 이야기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클리셰는 이유가 있어서 클리셰라 했던가. 레이디버드는 보편적인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누구나 겪어봤고 공감할 법한 그래서 흔하지만 마음을 관통하는, 레이디버드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자신을 ‘레이디버드’라고 부르는 새크라멘토의 십 대 소녀 크리스틴은 연애를 하고, 첫 경험을 하고, 친구와 다투고, 엄마와 싸우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도시의 대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이라고 해봐야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남자 친구가 게이였다거나, 또 다른 남자 친구에게 속아 허무한 첫 경험을 했다거나, 엄마 몰래 대학을 지원했다가 들켜서 싸우는 정도의 일들 뿐이다. 평범한 십 대 여자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으레 그렇듯이 특별한 것은 없다. 대신 영화가 빛나는 지점은 그 평범한 나날들에 돋보기를 들이대어 일상적 순간의 감정들을 캐치하고, 평범한 인물들에게 생동감을 불어넣고 그들의 상호작용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영민한 시선에 있다. 영화는 주인공 레이디버드만큼이나 다른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레이디버드에게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줄리에게, 대니에게, 카일에게, 혹은 엄마 매리언에게 나와 같은 모습 한 구석쯤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생동하는 인물들 사이의 유기적인 에피소드를 나열하며 <레이디버드>는 크리스틴의 1년을 그려낸다.
‘부자관계는 이렇고, 모녀관계는 이렇다’와 같은 게으른 도식화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수많은 영화 속 부자의 이야기가 아버지의 권위를 전복하는 아들의 살부서사를 그려낸다면 <레이디버드>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모녀관계는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다. 어떨 때 엄마는 딸에게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다. <분노의 포도> 낭독을 들으며 같이 울 수 있고, 실패한 첫 경험의 서러움을 위로받고, 같이 쇼핑을 가서 예쁜 옷 발견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엄마가 ‘엄마 역할’을 시작해 잔소리를 할 때면 달리는 차의 문을 박차고 뛰어내리고 싶고, 나를 키우느라 빚진 돈 모두를 갚아버리고 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 번의 싸움이 끝나면 다른 싸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크리스틴과 같은 딸들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엄마이자 동시에 친구이기 때문에 영영 차단해버릴 수도 없는 존재이고 그들 사이에는 끝없이 열리고 닫힘을 반복하지만 절대 잠기지는 않는 문이 세워져 있다.
딸에게 엄마는 존경이나 권위의 대상이기보다는 애증과 연민의 대상이다. 많은 딸들이 엄마에게 가지는 정서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일 것이다. 레이디버드도 마찬가지다. 레이디버드는 자신의 앞날이 엄마처럼 새크라맨토의 후줄근한 집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결말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결코 경멸의 대상은 아니며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은’ 자신을 엄마가 이해해 주길 바라고 끊임없이 공감을 갈구하고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레이디버드는 엄마가 방을 치우라고 잔소리를 하면, 엄마는 한 번도 방을 어지럽게 둔 채로 있고 싶던 적이 없냐고 묻는다. 겨우 제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냈더니 트집을 잡는 엄마에게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알겠는데, 나를 좋아하냐고 질문한다. <레이디버드>가 반짝하고 빛나는 장면들은 이런 순간이다. 엄마가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딸은 철이 든다. 그러나 엄마도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레이디버드는 엄마가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아직은 포기에 익숙하지 않은 십 대 소녀는 그 모든 것에 더해 엄마가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라는 것도 멈출 수가 없다. 수많은 가족 영화들을 보아왔지만 엄마와 딸 사이의 이런 간극, 부모와 자식 사이의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를 짚어낸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딸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인간이 아닌 엄마는 딸의 그런 질문에 선뜻 “좋아한다”라고 답해주지 못한다. 엄마는 겨우 “나는 네가 최선의 모습이길 바란다”는 모호한 답을 줄 뿐이다.
<레이디버드>가 보여주는 모녀 관계는 만족스럽지 않은 딸과 이상적이지 않은 엄마가 서로를 사랑하고 실망을 안기고 다시 사랑하는 과정의 연속체이다. 레이디버드가 그리 좋은 딸이 아니듯이 엄마인 매리언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레이디버드를 끊임없이 닦달한다. 샤워를 하고 수건을 두 개 썼다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빈둥댄다고, 그럴 실력도 없으면서 뉴욕대를 가겠다고 설친다고, 딸을 북돋아 주기는커녕 땅에서 한 발짝 떨어지려고 하는 십 대 소녀를 끈질기게 현실의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물론 그녀에게도 응당 그럴만한 이유는 있다. 버클리를 나온 아들은 마트에서 종업원을 하고 있고, 남편은 실직자고, 정신병원에서 당직을 뛰며 악착같이 벌어야 겨우 이 집과 가족을 유지시킬 수 있는 엄마에게 십 대 딸의 철없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레이디버드가 엄마를 보며 겪었을 감정을 아마도 매리언도 알콜중독자에 가정 폭력범이었던 엄마를 보며 겪었을 것이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래서 그녀는 레이디버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딸에게 해주고 있는데도 충분함을 모르는 딸이 괘씸한 것일지도 모른다. 딸과 마찬가지로, 이만하면 만족하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과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 사이에서, 딸을 사랑하지만 좋아할 수 없는 그 간극에서, 엄마 또한 헤매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틴은 스스로를 ‘레이디버드’라고 부른다. 누군가가 이것이 given name이냐고 묻자 그녀는 내가 스스로 나에게 줬기 때문에 given name이라고 말한다. 내 이름을 스스로 선언하고 남들에게 그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하는 유별남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인생을 온전히 내가 선택한 것들로만 채우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감정이다. 레이디버드는 자기 인생의 방향키를 쥐고 싶어 하지만 그 키를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녀가 뉴욕대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그곳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는 것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아니라 탈출에 대한 욕망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수많은 십 대 시절에 대한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좋은 것보다 싫은 것이 많은 이 시절의 동력은 탈출 욕구로부터 기인하고 레이디버드는 정확히 그 감정을 통해 세상과 교전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가 새크라멘토를 탈출했을 때 느끼는 것은 기쁨이나 설렘이 아니라 새로운 곳에 대한 실망과 지긋지긋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레이디버드라고 소개하지 않는 크리스틴은 시시한 파티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병원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토록 가고 싶지 않았던 가톨릭 학교에서 질리도록 들러야 했던 성당에 그녀는 스스로 들어간다. 그리고 탈출해 온 고향과 가족을 떠올린다. 영화는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새크라멘토를 드라이브하던 크리스틴의 모습 위로 매리언의 모습을 겹친다. 그리고 매리언이 크리스틴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를 남겼듯이 그녀 역시 엄마에게 사서함으로 ‘사랑한다’라는 말을 남긴다. 영화는 절묘하고 영리하게도 크리스틴의 성장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의 다음 장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멈춰 선다. 앞으로도 크리스틴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실망 사이에서 헤맬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완벽한 끝이라는 것은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