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촬영 현장 비하인드 - 1. 내가 좋아하는 모텔
드라마 촬영 현장 비하인드
지난해, 난 모텔을 참 많이 다녔다. 드라마 배경의 절반이 시골이라 지방 촬영이 잦았기 때문이다. 특히 경상북도 문경에서의 촬영이 대다수였는데, 이제 난 ‘문경’ 하면 ‘사과’가 아닌 ‘선샤인모텔’이 떠오른다.
처음 문경의 숙박업소를 알아볼 때 부장님께서 ‘선샤인 모텔’에 연락해 보라고 하셨다. 그곳은 수많은 촬영팀이 문경 숙박 시 단골로 이용하는 모텔로, 사장님이 촬영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금액대도 비교적 저렴하고 소통이 수월한 곳이라고 하셨다. 난 원활한 가격 협상을 기대하며 선샤인 모텔에 전화했다. 애교 섞인 목소리의 4~50대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모텔 사장님인 그녀는 나긋나긋하면서도 단단한 말투로, 능숙한 장사꾼처럼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조금 당황했지만 나 역시 수많은 모텔 사장님과 가격 흥정을 해온 경력자로서, 우리 팀은 한번 묵을 때 60개나 되는 방을 사용할 예정이니 객실당 4만 5천 원에 주십사 그녀를 설득했다. 다행히 선샤인 사장님은 빠르게 협상에 응하셨다. 그러나 숙박 당일, 선샤인 사장님은 우리에게 선샤인 모텔의 방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파라다이스모텔과 문모텔에서 묵으면 된다고 일방적인 통보 문자를 보냈다. 주변의 낡고 싼 모텔에 우리 팀을 넘겨서 커미션을 챙기고, 본인의 모텔은 객실 단가를 좀 더 쳐주는 다른 팀에게 팔 심산 같았다. 순간적으로 혈압이 솟은 나는 그 즉시 차를 몰고 선샤인 모텔을 찾아갔다.
모텔의 주차장은 대형버스 스무 대는 충분히 들어갈 만큼 널찍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려 소문의 선샤인모텔을 마주하자 파라다이스모텔이나 여기나 진배없겠다고 느꼈다. 모텔은 광주 할머니 집 근처의 50년 된 목욕탕과 비슷하게 허름한 외관이었다. 처음 지어졌을 당시 동화 속 성처럼 하얀 외벽이었을 그곳은 누렇고 검은 때로 뒤덮였다. 군데군데 갈라진 콘크리트 사이로 파고든 넝쿨과 창문 주변을 뒤덮은 나뭇가지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럼에도 약속과 다른 방을 준 사장님에게 화가 난 나는 꼭 이곳의 방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유리로 된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데스크의 작은 창문을 열고 가냘픈 체구의 사장님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긴 생머리에 꽤 청순 미인이셨다. 억척스럽고 표독스러운 아주머니를 상상했는데 의외였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핳핳핳’하는 특유의 크고 경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사장님은 다른 손님을 받기 위해 인근 모텔로 방을 주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셔서 날 또 당황케 했다. 그녀의 호탕한 기세에 조금 주춤했지만 약속대로 선샤인모텔의 방을 달라고 차분히 요구했다. 그녀는 직접 찾아온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다행히 문모텔의 방을 선샤인모텔로 바꿔주었다. 속은 능구렁이, 겉은 여우인 사장님께 매번 방 예약을 할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겨우 얻은 선샤인모텔의 방에 헤드 스텝들을 배정하고, 하나 남은 가장 작은 방은 나와 후배가 쓰기로 했다. ‘외관은 허름해도 내부는 멀쩡하겠지.’하는 생각으로 들어간 205호는 귀신의 방 같았다. 싱글 침대 두 개가 겨우 들어갈 만큼 숨 막히게 좁은 공간에 벽지 가득 빨갛고 큰 동백꽃이 현란하게 채워져 있었고, 어두운 톤의 목조 바닥에는 알 수 없는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화장실에는 80년대식 누런색 세면대와 욕조가 놓여있었는데, 화장실이 방보다 넓은 희한한 구조였다. 선샤인모텔의 을씨년스러움 때문인지 나와 후배는 잠을 깊게 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기상한 우리는 촬영 준비를 시작하러 모텔 1층에 내려갔다가 사장님과 마주쳤다. 사장님은 예의 크고 요란한 웃음소리로 다가와 사과 몇 알을 건네고 잘 잤냐고 물었다. 인사치레로 잘 잤다고 대답하니 그녀는 다행이라며 다른 방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녀의 손엔 깨끗한 수건과 촬영팀을 위한 아침 사과가 들려있었다. 처음 보는 유형의 캐릭터였다. 어제만 해도 적대시했던 그녀를 향한 감정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하루면 끝날 줄 알았던 문경 촬영이 갑작스럽게 연장되었다. 급하게 선샤인 사장님께 연락해서 숙소 연장을 부탁하니 촬영팀 일정 변동이 한 두 번이냐며 흔쾌히 연장을 해주셨다. 심지어 부족한 방은 다른 모텔에 연락해 잡아주셨다. 원래라면 내가 정신없이 전화를 돌려야 했을 텐데 사장님 선에서 해결해 주셔서 다행이었다.
급작스럽게 추가된 촬영 일정은 또 하나의 미션을 추가했다. 당장 내일 촬영에 쓰일 토끼가 필요해진 것이다. 나와 부장님은 토끼탕 집이며 시장이며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다가 1시간 30분 거리의 토끼농장에서 토끼 3마리를 구입해 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다음날까지 토끼를 차에 넣어두자니 초여름의 날씨에 토끼가 무사할지 걱정이었다. 또 이 토끼를 2주 뒤 이곳에서 다시 사용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보관할지도 난감했다. 우리는 방법을 고민하며 토끼 상자를 들고 모텔 주차장을 서성댔다. 마침 볼일을 보러 나온 선샤인 사장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녀는 토끼를 보고 한참을 웃어대더니 창고에 있는 큰 고무대야에 뒀다가 내일 가져가라고 했다. 부장님은 이때다 싶어 사장님께 2주만 키워주실 수 있냐고 넉살 좋게 물었다. 사장님은 알겠다며 대신 계속 선샤인에서 숙박을 해야한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감사해 사장님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날 내 숙소는 한층 더 올라가 좀 더 넓어진 307호였다. 어제보다 고된 일정을 지내서인지, 방이 좀 더 깔끔해져서인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2주 뒤 있을 문경 촬영은 멈출 줄 모르는 장마로 인해 2주가 더 지연되었다. 그동안 사장님은 종종 나에게 자신이 토끼를 키우게 될 줄은 몰랐다며 당근을 먹고 쑥쑥 자란 토끼들 사진을 보내왔다. 빨리 데려가라는 은근한 압박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부장님은 사장님 성격상 정말 토끼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럴 거라며 감사 인사를 하라고 했다. 난 그녀와 한 달 동안 토끼 사진과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사장님은 토끼 외에도 자신이 키우는 길고양이와 꽃 사진,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는 친한 동생의 사진을 보냈다. 나는 토끼를 잘 돌봐주십사, 그리고 독특한 그녀에게 홀려서 ‘저도 고양이 너무 좋아해요~’ ‘가수 동생과 닮으셨네요~’ 하고 정성껏 답장했다.
이후 우리는 문경 촬영엔 어김없이 선샤인모텔에서 숙박했다. 사장님과 나는 이제 척하면 척하고 필요 객실과 호실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른바 명예 제작팀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구해야 했던 칼질하는 손 대역도 맡아서 해주셨고, 닭이 필요할 때는 자신의 친정엄마에게서 닭도 구해다 주시고, 우리가 떠난 촬영 세트장의 문단속도 해주셨다. 그리고 친척들이 사과 농장을 한다며 촬영장 간식으로 사과를 보내주시기도 하며, 촬영에 사용하고 남은 처치 곤란한 김장 배추 100포기를 가져가셨다가 회식 자리에 김장 김치를 담가오셔서 덕분에 맛있게 나눠 먹기도 했다. 그녀와 나는 정말 한 팀처럼 마음으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의 방은 604호 스위트룸이 되었다. 모텔의 꼭대기 층으로 큰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불고 마을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나와 후배는 넓은 방에서 동료들을 초대해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어느덧 우리 팀은 문경에서 한겨울을 맞이했다. 문경엔 절대 눈이 오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던 동네 이장님 말을 우리는 믿었는데 결국 사달이 나버렸다. 문경에도 눈은 펑펑 왔고, 제설업체에 연락을 하지 않은 탓에 촬영 전날 눈이 엄청나게 쌓인 것이었다. 눈이 오지 않은 이전 씬과 연결된 씬이라 우리는 쌓인 눈을 전부 치워야 했다. 하지만 제작팀과 연출팀 6명으론 역부족이었다. 읍내 철물점에서도 겨우 토치 몇 개만 구할 수 있었다. 인력사무소에서는 눈이 너무 와서 당장 올 수 없다며 금액도 3배를 불렀다. 당장 내일 아침 촬영인데 큰일 났다는 생각만 들었다.
눈앞이 캄캄하던 나는 결국 선샤인모텔 사장님에게 SOS를 청했다. 그녀는 나의 불안한 목소리를 듣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걱정마!”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유능한 명예 제작팀이어도 펑펑 쌓인 눈을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 걱정되었다. 그런데 잠시 후 저만치서 ‘부웅-’ 하는 웅장한 소리와 함께 미니 포크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크레인에는 농사로 단련된 다부진 근육을 가진 40대 장정 넷이 타고 있었다. 사장님의 호출로 달려온 마을 어벤져스였다. 포크레인이 정차하자 어벤저스는 한 명씩 포크레인에서 뛰어내렸다. 히어로의 등장씬 같았다. 그들은 우리가 마당에 쌓인 눈만 겨우 치워내는 동안 익숙한 듯 뚝딱뚝딱 온 동네의 눈을 치웠다. 감사함에 모두가 뭉클한 마음이었다. 그들이 도와준 덕분에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내일 있을 촬영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다음날 사장님은 물에 젖은 우리들의 신발과 옷을 하루 만에 빨아 방 침대 위에 올려두셨다. 문경에서의 촬영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해가 바뀌고 문경 촬영은 끝이 났다. 선샤인모텔 사장님과 나는 언젠가 또 보자는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시간이 흘러 두꺼운 잠바를 벗고 예쁜 봄옷으로 기분을 내던 어느 날이었다. 선샤인 사장님이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노란 유채꽃 속에 파묻힌 토끼 사진이었다. 파주의 세트장에서 촬영 중 사진을 확인한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연락을 준 그녀도, 토끼도, 유채꽃도, 뒤로 보이는 선샤인모텔도 무척 반가웠다.
드라마 하나를 만드는 데엔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나와 우리 팀뿐만이 아닌 예기치 않게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의 진심이 닿는 순간, 나는 가장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