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촬영 현장 비하인드 - 2. 탬버린을 치는 하마
드라마 촬영 현장 비하인드
문득 하얗고 빵빵한 구름이 내 얼굴을 때렸다. 자동차 에어백이 터진 걸 처음으로 본 순간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내가 탄 조수석은 잔뜩 찌그러졌고, 후배는 차 밖에서 울고 있었다. 후배가 앞 차량을 박은 것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5년 전의 나 같았다.
그땐 내가 사고를 냈었고 조수석엔 ‘하마언니’가 있었다. 하마언니가 떠오르자 먼저 후배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피해 차 운전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경찰과 보험사에 연락하라고 일렀다. 하마언니가 내게 해줬던 일이다. 사회초년생 시절, 내겐 사냥을 가르치는 어미 새 같은 그녀가 있었다.
‘우와! 여자다!’ 여자라곤 나뿐인 연출·제작팀 사무실에 새로운 연출팀, 그것도 여자 팀원이 합류했다. 사무실 현관에 들어선 그녀는 큰 키에 적당한 살집이 있는 포근한 인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그녀의 활기찬 인사에 팀원 모두가 환대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어보니 친절하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사님은 반가움의 표시로 그녀에게 농담을 던졌다.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그 말에 “네 좀 쪘죠?” 하고 하하 호호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감히 내가 생각도 못 한 고단수의 답변을 했다. “이사님의 관심과 사랑 덕분입니다! 그런데 관심 덜 주셔도 됩니다. 하하하!” 상대의 무례한 농담을 지나치지 않으면서 농담으로 가뿐히 응수하는 사회생활 만렙의 모습이었다. 나는 입이 떡 벌어져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하마가 연상됐다. 순진하고 푸근해 보이는 하마는 자신을 위협하는 동물이 등장하면 물 밖으로 몸을 드러내 커다란 몸뚱이로 들이받는다. 나는 하마 같은 언니가 멋지기도 했지만 어딘지 조심스러워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얼마 뒤 우리 팀은 2박 3일 일정의 경상도 출장을 떠났다. 첫째 날, 어리바리 신입인 나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잔뜩 긴장해서 우왕좌왕했다. 하마언니는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제작팀으로써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설명해 줬다. 연출팀인 그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날 밤 같은 방에서 숙박하게 된 우리는 맥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긴장이 풀린 나는 맥주 한 캔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그래서인지 아직은 어려운 하마언니에게 일의 고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남에게 속 얘기를 하지 않는 내가 취중 진담을 하다니. 어쩌면 그녀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알코올의 힘을 빌려 먼저 나를 오픈한 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다음 날 아침, 함께 숙소 주변을 산책할 만큼 부쩍 가까워졌다.
둘째 날, 1980년대 풍경으로 보일만한 장소를 찾아 하루 종일 경상도 일대를 돌았다. 그러나 감독님은 썩 마음에 드는 장소가 없으신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사님은 냉랭하게 굳은 분위기를 풀고자 회식을 제안했고 우리는 영덕의 대게집에서 간단한 회식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숙소로 해산하는 분위기에서 이사님이 말했다. “2차는 노래방으로 가시죠!” 난 신입의 yes 맨 자세로 “네 좋습니다!” 외쳤지만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노래방 회식 단골 장면들 때문이었다. 남자 상사가 여직원에게 추근거리고 술을 강요하는 그 불편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까 봐 지레 겁을 먹었다. 게다가 겉으론 젠틀한 이사님이었지만 유흥주점 마니아라는 소문도 괜히 두렵게 했다. 다른 팀 내 또래 여자애들은 칼같이 이만 들어가서 쉬겠다며 숙소로 갔다. 난 그 말을 쉽게 하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얼굴도장을 찍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갈등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감독님과 이사님을 포함한 네 남자와 노래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내 옆엔 하마언니가 있었다.
식당 사장님의 소개로 간 노래방은 도착해 보니 정확히는 유흥주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한 화장을 한 중년의 여성이 남자들과 함께 온 나를 위아래로 쳐다봤다. 그녀 뒤쪽으로 열려있는 방에선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지금이라도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 나갈지 고민했다. 난 하마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하마언니는 나의 두려운 눈빛을 읽은 모양이었다. “앞으로 이런 상황 비일비재해. 그때마다 빠질 거야? 강자 앞에선 더 강해져야지. 우리가 더 신나게 놀자.” 그녀의 눈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똘끼가 보였다. 그 돌아있는 눈빛이 이상하게 신뢰가 가서 난 그녀를 따라 룸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 안은 구석에 화장실이 딸린 처음 보는 구조였다. 쿰쿰한 노래방 특유의 냄새에 화장실 문틈으로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지린내가 더해져 불쾌했다. 우리는 촌스러운 주황색 가죽 소파에 디귿자로 앉았다. 테이블 가득 양주와 과일 안주가 세팅되자 이사님이 끄트머리에 앉은 내게 말씀하셨다. “배영이가 한 곡 해야지!” 어르신들 앞에서 무슨 노래를 해야 할지 선곡부터 난감했다. 리모컨으로 인기차트만 오르내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무안하고 초조해져서 심장이 쿵쾅대던 그때 하마언니가 흑기사처럼 껴들었다. “배영. 같이 부르자!” 리모컨을 가져간 그녀는 룰라의 ‘3! 4!’를 예약하고 예사롭지 않게 마이크를 쥐었다. 나는 룰라 세대는 아니지만 테이프 가게를 하던 삼촌 덕분에 다행히 그들의 노래를 알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마치 원래 알던 사이처럼 자연스러운 파트 분배와 약속된 듯한 율동으로 완벽한 듀오가 되었다.
그 노래를 시작으로 언니는 싸이, 쿨, 자자, 홍진영의 노래까지 연달아 예약하고 메들리를 시작했다. 그녀의 노래방 레퍼토리였다. 하마언니는 중간중간 “이사님 뛰어!”를 외치며 탬버린을 흔들었다. 이사님의 엉덩이는 의자에 닿을 새가 없었다.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이사님의 흔들리는 동공이 번갈아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어느새 노래방의 주도권은 하마언니의 손에 있었다. 그녀의 탬버린 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오늘의 시름을 내려두고 들썩였다. 나는 어느새 판소리 고수처럼 그녀 옆에서 박자를 맞추고 추임새를 넣으며 한 팀으로 분위기를 장악했다. 피할 수 없으니 즐겼는데, 출장 중 가장 즐거운 순간이 돼버렸다.
현재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일한다. 하지만 여전히 난 하마언니를 따르고 그녀는 나의 안위를 챙긴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날 배운 그녀의 노래방 레퍼토리를 회식 때마다 아주 잘 써먹고 있다. 탬버린 연주도 수준급이 되었다. 또 후배가 낸 교통사고에서 그녀가 했던 대처를 따라 한다. 살이 쪘다는 말엔 관심과 사랑 덕분이라는 넉살로 답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나의 걸음걸음에는 하마언니의 흔적이 묻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