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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Sep 03. 2022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어떤 컨텐츠는 LPG가스통으로 머리통을 처맞은 것 같은 충격을 주기도 한다. 살다보면 그런 걸 만나는 때가 있다.


이를테면 팬픽 소설을 처음 봤을 때. 누군가의 블로그였다. 어쩌다 BL이란 말을 알게 되었고 그게 어떤 종류의 컨텐츠인지 궁금했다. 보이즈 러브라니, 반바지 입고 자전거 타는 풋풋한 소년의 서툰 연애 이야기 장르일까?


메모장 첨부파일을 열어보았다. 블로그 주인은 지오디의 팬이었다. 윤계상과 손호영이 주인공이었다. 일요일의 햇살이 내리는 흰 침대에서 늦잠을 자는 손호영을 윤계상이 깨우는 내용이었다. 윤계상이 브런치를 차려놓고 기다렸지만 손호영은 잠투정을 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윤계상은 침대에 올라가 손호영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계속 안 일어나면 망가뜨려버린다.”


망가뜨려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해 후 그것을 이 세계의 일부로써 받아들이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샤이니의 링딩동을 처음 들었을 때도 생각난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건가 싶어 가사를 펼쳐보고서 많은 생각을 했다.


링딩동 링딩동 디기딩디기딩딩딩.

판타스틱 판타스틱 엘라스틱 엘라스틱.


내가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작사만 해도 나는 평생 이런 가사를 쓰지 못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링딩동은 그제껏 내가 가사란 이런 것이지 하고 생각하던 정의를 무참히 oh crazy baby 하게 박살내버렸다.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인생을 제대로 살기 시작한 날, 혹은 제대로 살게 해줄 씨앗을 품은 날이 언제인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2005년 8월 5일, 부산 락페스티벌이 열린 날이다. 내 인생 최초의 락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락이 살아있었다. 언제부턴가 일렉트로니카에, 어느 순간엔 힙합에 밀려났지만, 나는 부산 락페를 기억한다. 또 펄프의 커먼 피플이 울려퍼지던 글래스톤배리의 밤을 알고 있다. 오아시스 냅워스 공연을 보기 위해 광주광역시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매를 시도하던 시절을 알고 있다. 그래 이제 음악페스티벌만 있고 락페스티벌은 없지만.


2005년 부산엔 디어사이드, 리치 코젠, 도메인 같은 해외 뮤지션과 글램, 스키조, 크라잉넛 같은 국내 뮤지션이 무대에 섰다. 그때는 무료였고, 다대포 해수욕장 한가운데 뜬금없이 무대를 세워놓고 음악평론가 성우진씨가 사회(!)를 봤다. 그때도 숨막히게 더웠다. 소방차가 물을 실어날라 뿌려주었다. 누군가 “물 좀 주소, 목마르요”하는 한대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다 같이 따라불렀다. 그럼 뮤지션들이 생수를 던져주었다. 그 와중에 “동남아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몇 사람이 가슴을 만지고 도망치고 있으니 여자분들은 주의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제는 설화나 전설 같은 그 악명대로 부산락페는 개빡센 페스티벌이었다. 웃통 벗고 슬램하고 원을 만들어 모싱을 하고 한 6명이 동시에 바디서핑을 했다. ‘신을 죽인다’는 뜻의 디어사이드는 부루털 데스 메탈을 자비 없이 90분 동안 안 끊고 달렸다. 그때는 쌩쌩하던 크라잉넛이 다죽자를 부르면서 관객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놓고 가운데서 부딪히게 했을 때는 다들 광분해서 진짜로 다 죽을 뻔했다. 누군가 넘어지면 바로 어깨를 끼우고 둥글게 스크린을 쳐서 보호해주던 부산 싸나이들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입안이 세 군데 터져있고 턱에 멍이 들고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도, 그다음 날도 다대포에 갔다. 가서 머리통을 흔들고, 서클에 뛰어들어 슬램이란 것을 해보고, 모르는 사람 어깨를 잡고 기차놀이를 하고, 가슴 만지고 도망가는 동남아인을 부산 형들이 추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렇게 강렬한 에너지를, 해방감을 나는 거기서 처음 느꼈다. 그게 나의 어딘가를 뻥 뚫어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창밖을 보며 살아가는 게 꽤 재밌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 뭉클함을 잊을 수 없다.




잊지 못할 날들이 많이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나는 밤새 혼자 앉아있었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에서 육이오 피난길을 얘기하는 할머니를 읽고 내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어 네 번 다시 봤을 때. 쥬라기 월드컵 보던 초등학생이 아무 준비 없이 <원령공주>를 봤을 때. EBS에서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을 보고 충격을 받아 목적도 없이 4시간을 걸었을 때. 가족들과 주말의 명화에서 <가위손>을 하하 재밌게 보고나서는 자다 말고 일어나 엉엉 대성통곡을 했을 때도.


그런 컨텐츠를 만난 날들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 사는 내내 꺼내먹을 좋은 추억들이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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