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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Jan 27. 2024

뉴뉴진스와 포스트포스트말론이 나온대도

옛날 노래가 좋다, 고 입 밖으로 내고 나면 왠지 이젠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늙기 시작하는 것만 같다. 근데 사실, 그렇다. 솔직히. 옛날 노래가 좋다. 실은 꽤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요즘 음악을 꾸준히 찾아듣긴 하지만, 어쩌면 그건 주기적으로 새치염색을 하는 행위 같은 건지 모른다. 검은 머리에서 반쯤 흰머리로 넘어가는 걸 감추고 스스로도 보고 싶지 않은.


물론 뉴진스도 좋고 르세라핌도 좋아한다. 그 순수와 생기와 무지개 같은 찬란함과 복근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에서 뉴진스 뮤비를 틀었다가 2시간을 홀려서 보기도 했다. 처음엔 해린으로 시작해 민지로, 민지에서 다시 다니엘이, 이제 또 하니가 가장 눈이 가는 이른바 ‘회전문’에 돌려지고 있다.


포스트말론도 좋아한다. 타이니 데스크에 나와 노래할 때 인간적이고 담백한 모습이 맘에 쏙 들었다. 다이아몬드 송곳니와 페이스 타투를 하고선, 어디서 배웠는지 한 곡 끝날 때마다 꾸벅꾸벅 한국식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꽤 귀엽다(포말이 노래를 깜짝 놀라게 못할 때마다 세션들이 이 악물고 웃음 참는 모습이 영상의 킬링포인트다).


다만, 거기까지다. 이들의 음악이 내 마음속 깊은 샘에 파장을 일으키진 않는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형성됐을지 모를 나의 불안을 알아주는 느낌에 위안을 얻지도 않는다.


그런 음악들이 있었다. 좋다, 같은 밋밋한 감정을 아득히 넘어 삶의 한 시절을 버텨낼 동력이 되어주던 음악들. 자라며 들어온 그 음악과 앨범과 뮤지션 들은 내 삶에서 어떤 양식이나 지침이 되기도, 유일하게 내 마음에 공감해주는 친구이기도, 응당 종교이기도 했다.


왜 옛날 노래들이 좋을까. 그건 저지클럽이 ‘요즘 애들 음악’이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게 내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 감정을 이해하고 노래로 불러주는 사람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곡들이 아니기 때문에. 음악은 다층적 종합예술이지만 근간은 역시 음악이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것을 노래로 해왔다. 그래서 음악을 듣다보면 신이 나거나 뭉클하거나 결국 또 마음이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주고, 심하게는 나와 하나가 되기도 했던 음악들. 누군가에겐 그게 이문세일 수도, 심수봉이나 김광석이나 들국화일 수도 있다. 아니면 라디오헤드일 수도, 버브나 펄프나 마이블러디발렌타인이나 속옷밴드일 수도 있다. 혹은 SES나 지오디, 블랙핑크나 BTS일 수도. 그게 누구든 그들은 내가 간절히 필요하던 시점에 노래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뉴진스도 좋고 포스트말론도 좋지만, 뉴뉴진스와 포스트포스트말론이 나온대도 그 감사하고 절실한 위안만큼 내 마음을 움직일 순 없을 것이다.


내가 지나온 시절의 뮤지션들은 여러 감정들 중에서도 특히 우울함이란 감정을 어떻게든 해보고자 했다. 어떤 뮤지션은 우울과 친해져도 보고, 또 누군가는 우울함에 화를 내보기도 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나는 사실상 라디오헤드와 합숙한 것과 다름없다. 당시의 나에겐 그게 절실히 필요했다. 핑크플로이드나 오아시스나 캐미컬브라더스가 없었더라면, 아니 언더월드나 플라시보나 스매싱펌킨스 정도만 없었더라도, 나는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그래, 이젠 인정하고 옛날 노래들을 다시 열심히 듣자. 안티티티티 후레자일 댄스를 조금이나마 춰보려고 노력하는 일도 그만두기로 한다. 애초에 카즈하의 복근이 아무리 멋지다 한들 톰 요크의 안검하수를 이길 순 없는 거였다. 흰머리가 뭐 어때서. 길러보면 또 그게 꽤 맛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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