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와 나

by Sangchun Kim


원래 오늘 방구에 관한 글을 쓰려고 했다. 쓰고 싶은 게 정말 없을 때 한끼 때울 요량으로 킵해놓은 주제였다. 머릿속에 먹긴 싫고 버리긴 또 아까운 ‘글쓰기 재료 냉동실’ 같은 게 있는데, 거기 있는 저질 재료들을 뒤적거리다가 ‘방구’를 해동시키고자 상온에 꺼내놓은 것이다.


어제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 나 상천쓰 39살 10개월, 다 큰 성인이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진지한 얼굴로 방구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원래 방구를 뀌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방구를 뀌어본 것은 1998년 여름이었다. 그때도 딱히 방구가 마려웠던 건 아니다. 그냥 문득 방구를 뀐다는 감각이 어떤 건지 궁금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한번 뀌어본 것이다.”


대충 전자레인지 돌려먹으면 될 줄 알았으나, 주말에 카페에 나와 방구에 관해 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앉은 자리가 하필 입구 쪽이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신경쓰였다. 뒤에 지나가던 여자가 내 모니터를 보곤 고약한 냄새라도 맡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방구에 관하여”였던 제목은 “ㅇㅇㅇㅇㅇㅇ”으로 바꿔놓아야 했다. 그렇게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마다 눈치를 보다보니 슬랙을 켜기도 하고 일기를 쓰게되기도, 심지어 일도 잠깐씩 하게 되었다.


정신차려보니 방구로 때우고 빨리 게임이나 하자던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생산적인 일들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와 환경이 이렇게 중요하다. 이렇게 된 거 방구는 비닐에 잘 싸서 다시 냉동실에 넣어둔다. 이건 언젠가 요긴하게 뀔.. 아니 쓸 때가 있을 것이다(버린다는 생각은 끝까지 안 하는구나). 오늘은 2026년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주변에 사람 서있을 때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 쓰던 건데 이렇게 되었다.




아니다 역시 귀찮다. 요즘 자꾸 이런다. 너무 쉽게 무기력해진다. 사실 이게 요즘의 고민이다. 일과 삶의 전반에서 전처럼 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환경이 주어지면 또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재밌게 하고 성과도 낸다. 그러면서 능력치 자체엔 아직 문제가 없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남몰래 안도하곤 한다. 그리곤 환경이 느슨해지면 또 금방 무기력해진다. 엔진이나 주행기관엔 문제가 없는데 시동이 자꾸 안 걸리는 차처럼.


요 며칠 계속 이 문제에 관해 고민했다. 다행히 어느정도 원인과 해결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내가 찾은 원인은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올해 삶에 몇 가지 큰 변화들이 생겼다. 11년 넘게 일해온 회사를 매각하면서 올해부터는 더이상 공동창업자나 대표가 아니게 됐다.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은 한국 미국 캐나다의 합작법인인데, 각 나라별로 한 명씩 대표가 3명이다. 나는 대표가 아니다. 대표건 직원이건 상관은 없는데 일의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돌아보니 직장인에 가깝게 일하는 게 아직 적응이 안 됐던 것 같다.


올해 이런 큰 변화 여럿이 동시에 이뤄졌다. 일 뿐 아니라 가족 관계, 돈에 관한 생각, 삶을 대하는 방식 등 많은 부분에 있어 구조 자체가 바뀔 변화들이 생겼다. 구조가 바뀌었으면 동력의 점화도 기존과 다른 회로를 통해야 한다는 걸 최근에야 깨닫는 중이다. 그걸 모른 채 계속 왜 이러지,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생각을 했다.


2026년엔 우선 과거를 정리해야 한다. 미련을 버리기 위함이다. 그래야 자꾸 돌아보며 멈칫하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다 지나간 일들이다. 중요한 건 미래이니 이제는 한번 크게 정리하고 더이상 지나간 삶은 돌아보지 말자. 아니 돌아볼 수밖에 없다면 그걸 연료로 쓰자. 그것도 에너지다. 긍정적으로 쓰자.


다음으로 인풋이 바뀌어야 한다. 기존의 인풋은 이제 유효하지 않은 게 많다. 구조와 환경이 바뀌었다면 인풋도 그에 걸맞은 종류로 바뀌어야 한다. 적절한 인풋이 차면 아웃풋은 나온다. 인풋의 질을 높이고 너저분하다 싶으면 이제 그런 건 끊자. 적합하고 질 높은 인풋들을 찾아다니자.


마지막으로 새로운 루틴이 필요하다. 부담스럽거나 무섭지 않은 구성이 핵심이다. 지금 폼이 내려와있음을 인정하고 단계단계 올라갈 수 있도록, 작은 노력으로도 완료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들이 도움 될 것이다. 조금씩 매일 나아지는 방향으로 하자. 완성도있게 하려고 하지 말고 방구만 돼도 그냥 하자.


정리(미련 버리기) → 준비(새로운 인풋) → 실행(새로운 루틴)이네. 괜찮은 것 같다. 앞으로의 새 10년을 준비하는 첫 해다 생각하고 뉴 이어 뉴 미 해보자. 무리하지 말자. 하루에 0.01씩만 좋아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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