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석몰촉(中石沒鏃) 고사
: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이장군열전'
중석몰촉(中石沒鏃)은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온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면 어떠한 일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사성어입니다.
이광李廣 장군은 한나라 초기 효문제, 효경제, 한무제 때의 장수로서 흉노와 70여 차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흉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인물입니다. 그의 선조 이신은 진秦나라 때 장군으로 연나라 태자 단丹을 추격해 잡은 업적이 있었으며 집안 대대로 궁술을 전수받은 무장 가문이었습니다. 효문제는 이광의 용맹함을 칭찬하면서도 안타까움을 내비친적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대는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만일 고제 때(한고조 유방)
살았더라면 만호의 제후쯤은
어찌 말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사기열전/사마천지음, 김원중 옮김
흉노와의 전쟁에 수많은 공을 세웠던 이광 장군은 한나라로 돌아가 많은 부하를 잃고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친 일을 들어 참수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습니다. 평민이 되어 낙향하여 집에 들어서 활쏘기와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우북평 태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풀숲에 있는 돌을 호랑이로 잘못 보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활을 당겼더니 그 화살이 그 돌을 꿰뚫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중석몰촉(中石沒鏃)입니다. 신기해서 다시 같은 거리에서 활을 당겼지만 화살을 돌을 맞고 튕겨버렸습니다. 정신을 한데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무장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광도 관직에서의 요행은 없었습니다. 한무제의 외척인 대장군 위청 휘하에서 많은 경계를 받았습니다. 흉노와의 싸움에서도 공을 세우기 어려운 코스로 배정받아 돌아가면 싸움이 끝나버려서 승진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곤 했습니다. 한 번은 이광이 우회하여 본진을 지원하게 되었는데 늪지대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흉노 선우를 잡는데 실패하자 이광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부하들에게 죄가 없음을 밝히고 스스로 칼을 빼어 목을 찔러 자결을 합니다. 그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마천이 화를 입었던 이릉지화李陵之禍 기억나시죠? 주인공인 이릉이 바로 이광 장군의 손자입니다. 이릉은 한무제의 명을 받고 5000명으로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5만 명을 만나 싸우다가 결국 포로가 되었고, 소문에 흉노 군대를 양성한다는 음해를 받으면서 일가족이 몰살되었습니다. 아무도 이릉을 위해 변호를 하지 않자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이광부터 한나라에 충성해온 무장이라는 점과 5천으로 5만을 상대하기는 중과부적衆寡不適이었다고 변호했다가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돈이 없고 궁형을 당해 살아남는데 그 중심인물이 이광의 손자 이릉이었던 것입니다.
이장군 열전에는 이광의 가문이 몰락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이광의 세 아들의 죽음을 얘기하는데, 첫째 아들 이당호는 이광보다 먼저 죽었는데 이당호의 아들이 이릉이었습니다. 둘째 아들 이초도 일찍 죽었습니다. 셋째 아들 이감李敢은 외척 출신 표기장군 곽거병의 휘하에 있었는데 부친 이광의 원한을 갚기 위해 거기장군 위청을 폭행했다가 사냥터에서 곽거병의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황제는 묵인합니다. 사기열전 이장군 열전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인간사, 참으로 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씨 가문은 점점 몰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