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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22. 2021

김연실의 전성시대

무성영화시대 스타 김연실 3편

승방비곡에서 윤봉춘과 함께(좌), 철인도에서(우)


<잘 있거라>와 <세 동무>의 연이은 성공으로 김연실의 이름은 영화 팬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단성사에서는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던 그녀를 각종 행사에 참여시켰다. 평소 노래를 잘 불렀던 김연실은 행사장에서 그 솜씨를 뽐냈다. 단성사 변사 서상필이 이끄는 “단성사활동사진순업대”에 합류하여 전국을 누비기도 했다. 1928년 추석을 맞아서는 경성부에서 주최한 영화상영대회에 출연하여 영화에서 함께 연기했던 이원용과 함께 무대 인사를 했다. 


그 사이 금강키네마에서는 다음 작품으로 <종소리>를 만들기로 한다. 연출은 김상진이 맡았다. 그는 단성사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특히 <장화홍련전>을 비롯해 여러 편의 영화에서 포스터칼라로 써도 힘든 영화자막을 페인트로 써 자막의 일인자로 이름을 떨친바 있다. 그는 이평(李平)이라는 예명으로 <종소리>의 원작, 감독에 이름을 올렸다. 촬영은 최고참 촬영기사 이필우가 맡았다. 이필우는 오빠 김학성과 친구사이로 김연실이 보따리를 들고 서울을 헤매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찾아 뵌 영화계 선배이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김연실은 처음으로 주인공 역을 맡았다. <잘 있거라>나 <세 동무>에서는 전옥, 복혜숙이 여주인공이었고 김연실은 조연에 불과했지만 <종소리>에서는 그녀가 주인공이었다. <종소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회사원 영희(이원용 분)와 그 회사의 타이피스트 애경(김연실 분)은 사랑하는 사이이다. 애경에게 마음을 둔 사장(이경선 분)은 영희를 출장 보낸 후 그가 회사 돈을 횡령했다며 누명을 씌운다. 영희가 고초를 겪는 사이 사장은 애경을 꼬여 그녀와 결혼하지만 곧 싫증을 내고 그녀를 버린다. 사장이 만들어 놓은 덫을 뚫고 돌아온 영희는 이 모습을 보고 사장에게 복수하려 한다. 사장을 죽이기 직전 영희는 기독교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떠올리며 애경과 함께 교회당으로 달려간다. 교회당에서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종소리>는 1929년 4월 3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김연실의 연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작품이 만들어지는데 있어서 중요한 한 전형을 연기했다는 양류성의 평가에서부터 김연실의 고요한 연기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청초한 느낌을 준다는 안석영의 호평이 이어졌다. 《동아일보》에는 “재래에 나타난 모든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새 경지를 개척했으며 주인공과 자기 처지를 구별치 않고 감정을 마음대로 주입(注入)할 수 있는 모양”이라는 찬사가 실렸다. 바야흐로 김연실의 전성시대가 열리는 듯 했다.


이 영화가 크게 성공하면서 여름철 인천의 해수욕장에서는 김연실을 모델로 삼아 해수욕장 광고를 했다. 해수욕장 일대는 그녀를 보려는 사람들로 큰 소동이 일기도 했다. 김연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그녀를 사모하는 남성 팬들의 구애는 노골적이었다. 팬레터가 쏟아지는 것은 물론 잡지에까지 김연실을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글이 심심치 않게 등장할 정도였다. 


김연실은 언제까지 인기에 취해있을 수는 없었다. 연기자로 살아가려면 연기를 더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즈음 김연실은 박승희가 이끌고 있던 토월회의 무대에 섰다.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서는 극단에 들어가 활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들어갈 만한 극단으로 점찍은 곳은 토월회였다. 당시 토월회에는 김연실과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전옥, 복혜숙, 석금성 등 쟁쟁한 여배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연실이 토월회에 입단한 시기는 토월회가 광무대에서 나와서 재기를 도모하던 1928년 9월 이후였다. 전성기를 지나 한풀 꺾인 토월회는 이후 신흥극장, 태양극장으로 이어졌다. 김연실은 1930년 2월 토월회 지방순회공연에 참여했고, 11월에는 신흥극장에서 제작한 <모란등기>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중국어 원작인데 카프 소속의 소설가 이기영이 번역하고 일본의 츠키치소극장에서 연극을 하다 귀국한 홍해성이 연출을 맡았다.


1929년 <벙어리 삼룡>을 끝으로 나운규프로덕션이 문을 닫았다. 방종과 방탕한 생활로 일관하던 나운규에 실망한 그의 동료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당황한 나운규는 잠시 일본으로 건너가 휴식을 취했다. 조선에 돌아왔지만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단성사에서는 방황하고 있는 나운규를 붙잡아 놓고 그가 계속 영화를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금강키네마의 문을 잠시 닫고 나운규를 위해 원방각이라는 새로운 영화제작회사를 세웠다.


원방각의 첫 번째 영화는 나운규의 이름을 널리 알린 <아리랑>의 후속편이었다. <아리랑 후편>이라 이름 붙은 이 작품의 연출은 나운규가 아닌 단성사 선전부에서 일하던 이구영이 맡았다. 나운규가 자기 멋대로 행동하여 영화를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대신 나운규에게는 다음 작품의 연출을 약속했다.


<아리랑 후편>의 촬영이 끝나자 나운규는 <철인도>의 연출을 준비했다. 나운규는 이 영화를 연출하면서 김연실에게 여주인공 마리아 역으로 출연해 달라 부탁했다. <철인도>는 광산촌을 배경으로 한 서부극풍의 영화였다. 나운규는 절치부심하며 이전보다 더 열심히 준비했다. 그래서인지 촬영은 빨리 끝났다. 영화는 1930년 4월 14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산촌을 배경으로 아랫마을 사는 개고기(라운규 분)와 윗마을 사는 경칠삼(박연익 분)이 밤낮 싸움질로 세월을 보낸다. 목사(박제행 분)가 운영하는 교회와 야학이 있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다. 어느 날 목사의 딸(김연실 분)이 하와이에서 오고 그녀를 사이에 두고 개고기, 경칠삼 둘이 동시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목사의 딸을 연모하는 또 다른 인물인 탄광 십장이 모략을 꾸며 이 둘을 궁지에 빠트리고 밤낮 으르렁거리던 이 둘은 힘을 합쳐 탄광 십장의 모략을 폭로하고 오랫동안 갈등하던 관계를 해소한다. 더불어 야학에도 나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당시는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의 전성기였다. 영화계에서도 카프를 중심으로 한 좌익영화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은 주로 흥행위주의 영화에 대한 비판과 민족주의영화인에 대한 폭로를 강화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나운규가 그 타겟이었다. 나운규가 <아리랑 후편>에 출연하고 이어 <철인도>를 만들자 이 두 작품은 남궁옥, 서광제, 윤기정 등 카프영화인들의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의 날선 비판에 나운규, 이필우, 안종화 등 민족주의 계통의 영화인들이 맞대응을 하였다. 양측의 날선 공방이 오갔다. 그러다보니 <철인도>에서 김연실의 연기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못했다. 서광제는 “하와이에 다녀왔다는 여자의 연기로써 어색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실제 좌익영화인들의 집단행동은 1929년 말부터 본격화 되었다. 1929년 마지막 날, 영화인들이 아성키네마에 모여 망년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영화담당 신문기자로 구성된 찬영회에 대한 투쟁이 논의되었다. 그 결과 영화인들은 찬영회원들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을 구타하였다. 이 사건은 서로 화해하면서 해결되었지만 앙금은 남았다.


1930년 이른 봄, 찬영회 회원이던 이서구는 영화인들과 일종의 화해를 위해 자기가 운영하던 영화수입, 배급회사인 동양영화사를 확대하여 영화제작에 나서겠다고 했다. 이서구가 선택한 작품은 그와 마찬가지로 찬영회 회원인 최독견의 대표작 <승방비곡>이었다. 이 작품은 우연히 만난 남녀가 사랑을 나누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결국 서로가 이복 남매인 줄 알게 되면서 운명 앞에 좌절하게 되는 젊은 남녀의 슬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이구영 연출로 만들어진 <승방비곡>에서 김연실은 악역으로 나오는 필수(이경선 분)에 의해 버림받고 눈까지 멀게 되는 소작인의 딸 명숙 역으로 출연했다. 원래 최독견이 이 작품을 연재하던 때에는 명숙 역으로 <아리랑>의 히로인이던 신일선을 염두에 두었다. 그때는 신일선이 최고의 인기였기에 그랬다. 시간이 흘러 실제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자 신일선은 은퇴한 후였고 그 역은 당대 최고의 스타인 김연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김연실은 <승방비곡>을 촬영하면서 다른 영화를 촬영할 때보다 더 심한 고생을 했다. 명숙이 자신을 버린 필수의 차에 치이는 장면을 촬영을 할 때였다. 김연실이 바퀴 밑에 들어간 상태로 감독의 신호에 맞춰 자동차가 움직였다. 육중한 자동차는 그녀의 작은 몸을 깔아뭉개고 지나갔다. 김연실은 너무 놀라 기절했다. 영화촬영은 중지되었고 기절한 그녀는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동안 입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몸을 추스르자마자 촬영에 복귀했다. 이번에는 강물에 빠져죽으려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김연실은 실제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죽을 뻔 했다. 안전장치도 없이 무모하게 진행된 촬영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나서야 촬영은 마무리 되었다. 고생 끝에 제작된 이 영화는 1930년 5월 31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영화가 개봉되자 카프 소속의 좌익영화인들은 역시 이 영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명숙의 오빠 명진 역을 맡은 윤봉춘의 연기만은 칭찬 일색이었다. 반면 김연실의 연기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렸다. 서광제는 “후반에 가서 화장이 너무 희었으며 눈먼 장님의 동작으로는 너무 가벼웠고 의장(衣欌)이 부적당하다. 카메라와 각색으로 그의 연기는 살았다.”는 다소 박한 평가를 했다. 반면 찬영회 회원인 김을한은 김연실에 대해 “종래에 볼 수 없던 연기를 보여주었고 상상 외의 역연이라 하겠지만 표정의 분별이 더러 모호할 때도 있다”며 장단점을 구분해 평가했다.


1930년에 들어서서 <철인도>와 <승방비곡>에서 연이어 주연을 맡은 김연실은 스크린을 장식하는 가장 인기가 많은 배우였다. 너도 나도 그녀를 영화에 출연시키기 위해 접촉했다. 쉴 틈이 없었다. 《매일신보》에는 바쁜 그녀의 일상과 여배우로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김연실은 이 글에서 “연실이 내일은 한강 철교에 새벽장면이 있으니 새벽 세시에 회사로 오시오.”라는 지시를 받으면 시간에 늦을까봐 앉아서 졸다가 새벽거리에 나서면 형사에게 불량소녀라는 억울한 취체도 받기도 했다고 이야기 했다. 또한 연기 걱정에 수면부족에 걸린 일도 많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주는 출연료는 얼마 되지 않아 어린 동생의 월사금 걱정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연실씨! 왜 고개를 좀 더 들고 남자에게 턱 안겨서 아양을 못 떤단 말이요. 자-다시 박읍시다.”


감독의 질책이 쏟아질 때면 울려야 울 수도 없다는 푸념도 이야기 했다. 


1930년 당시 조선최고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김연실이었다. 모두들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무대에서든 카메라 앞에서든 항상 최선을 다했다. 거기에 건강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뭇 남성들은 김연실의 발랄한 모습에 흐뭇해했으며 이중에는 김팔지와 같이 심한 짝사랑을 앓는 이도 많았다.


김연실은 대구 녹성키네마에서 제작하는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을 촬영하기 위해 1930년 여름을 포항에서 보냈다. 이 영화는 무릉도라는 섬을 배경으로 도회지 사람들에 의해 자유어업권을 빼앗긴 어민들의 투쟁을 소재로 한 영화로 토월회 회원이던 박제행, 심영, 나웅 등이 함께 했다. 촬영을 끝내고 서울에 올라오니 카프소속 영화인들이 영화에 출연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김연실을 데뷔 때부터 봐왔고 <승방비곡>에서 오누이로 출연했던 윤봉춘이 매니저 격으로 김연실의 스케줄을 관리해 주었다.


당시 카프소속 영화인들은 문예운동의 볼셰비키화라는 보다 좌경화 된 움직임을 보이던 중 내분으로 갈등을 겪었다. 1930년 봄 카프소속 영화인들이 주축이 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해산하라는 카프중앙의 명령으로 인해 카프중앙을 대변하는 윤기정과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지키려던 김유영, 서광제 등으로 나누어 갈등을 빚었다. 결국 카프 지도부에서는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해산하는 대신 <혼가> 제작 후 문을 닫은 서울키노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절충하게 된다.


부활한 서울키노에서는 조명희 원작의 <낙동강>을 영화로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출자자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이때 시내에서 백조상회라는 상호로 나염업을 하던 카프 소속의 배우 석일량이 투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자신이 짝사랑하던 김연실을 주인공으로 쓰자고 했다. 이뿐 아니라 <낙동강>보다는 《중외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화륜>이 나을 거라고도 했다. 


<화륜>은 공장 노동자를 소재로 한 영화로 암담한 생활 속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들과 반대로 착취만을 일삼는 공장주와의 갈등과 열악한 설비로 노동자들이 큰 부상을 당해도 아무런 사회적 보장도, 혜택도 없이 쫓겨나게 되는 상황에 대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파업투쟁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카프소속 영화인들의 출연 요청을 받은 김연실은 영화출연을 승낙했다. 그것도 무보수로 출연하기로 했다. <철인도>와 <승방비곡>에서 김연실의 연기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해댔던 젊은 친구들에 묘한 호기심이 동했던 것이다. 사실 이들과는 친구 사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비슷한 나이였으며 이중에는 신문지상에 필명을 날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젊고 진보적인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김연실은 이미 출연하기로 계약되었던 영화를 취소하고 <화륜>의 제작에 참여하겠다고 한 것이다. 


김연실이 출연 승낙을 하자 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감독은 <유랑>과 <혼가>를 연출했던 김유영이 맡았다. 영화 촬영이 시작된 10월 조선극장에서는 김연실이 출연한 해양 비활극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이 개봉되었다. <화륜>의 촬영도 한창이었다. 이 무렵 김연실에게 구애하던 석일량이 급기야 청혼까지 해왔다. 그는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김연실이 석일량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촬영장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그렇다고 김연실이 출연을 포기한다면 영화제작은 수포로 돌아갈게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은 계속 이어졌고 촬영이 마무리 되면서 비로소 불편한 상황도 일단락되었다. 이제 영화의 개봉만 남았다.


<화륜> 촬영이 끝나자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동식 소형극장이라는 이름의 극단이 꾸려졌다. 김연실도 이 극단에 참여했다. <화륜>의 연출자 김유영과, 연작 시나리오의 필자 중 한명인 이효석 그리고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추민도 가입했다. 더불어 석일량도 이름을 올렸다.  


<화륜>이 개봉되자 임화, 윤기정을 비롯해 카프중앙의 핵심인물들이 이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연출을 맡은 김유영과 시나리오를 쓴 서광제가 영화 실패의 책임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특히 김유영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본인이 주도적으로 조직했던 이동식 소형극장에서 발을 뺐다. 활동은 지지부진한 채 시간만 흘렀다.


김연실만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화륜>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출연하기로 약속한 <수일과 순애>의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영화는 <장한몽>의 또 다른 버전으로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에 출연했던 심영, 박제행과 같은 토월회 출신의 배우들과 <승방비곡>에서 함께 출연한 이경선, 윤봉춘 등이 함께 했다.


<수일과 순애>는 해를 넘긴 1931년 3월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 출연한 김연실에 대해서는 “표정과 액션이 어느 영화에 있어서나 다름이 없는 것이 조그마한 유감이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표하는 기사가 실렸다. 1930년대 초반 조선영화의 주인공을 도맡은 김연실의 연기에 대한 피로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동식 소형극장이 유명무실한 가운데 김연실은 토월회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신흥극장, 태양극장의 무대에 섰다. 특히 노래를 잘 불렀기에 막간 무대에서 노래도 하고 만담도 했다. 


당시 음반회사들은 인기 있는 조선의 배우들과 가수들의 목소리를 음반에 담기 시작했다. 김연실도 이 시기 다양한 음반들을 녹음했다. 1930년 빅터레코드에서는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아르렁>을 김연실의 목소리로 담아냈다.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된 계기였다. 시에론에서는 김연실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김연실은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수원을 노래한 <화성의 봄>을 불러 유행시켰다. 또한 <신가정생활>이라는 난센스음반도 녹음하여 대히트를 했다. 1935년 무렵까지 김연실이 녹음한 음반은 유행가를 비롯해 영화극, 풍자극 그리고 난센스음반들로 다양했으며 도합 50여 편이 넘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신가정생활>을 비롯해 <서양 장한몽>과 같은 난센스음반이었다. 이렇듯 1930년대 초반 조선인들은 귀엽고 깜찍한 김연실의 목소리에 미소 짓고 있었다.


https://youtu.be/_nPGgRBREZ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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