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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27. 2021

공훈배우 다시 인민배우로

무성영화 시대 스타 김연실 6편

1960년대 김연실의 모습


다양한 역을 연기하고 싶었지만 젊은 배우들 틈에서 40대 나이의 고참 배우인 김연실이 맡을 수 있는 역은 주로 노역이나 단역이었다. 어머니 역이나 할머니 역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1957년 창극 <심청전>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에서 김연실은 장승상댁 부인 역을 맡았다. 이어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모자의 엇갈린 운명을 영화로 만든 <어떻게 떨어져 살 수 있으랴>에서는 움집 할머니 역을, 1958년에는 공화국창건 10주년 기념작인 <그가 가는 길>에서는 태섭 어머니 역을 맡아 연기했다. 


1959년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소재로 한 전동민 연출의 <애국자>와 천리마시대의 일상을 그린 강홍식, 김기호 공동 연출의 <행복한 거리>(1959)에도 출연했다. 이 영화는 직장에 진출한 여성의 사업과 생활을 통하여 상업정책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상업일군들의 봉사성과 가정에서의 새 것과 낡은 것과의 투쟁을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1960년에 들어서면서 한설야의 소설 <형제>를 원작으로 한 <6남매>에 출연하기로 했다. 박태영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영섭이 연출을 맡기로 했다. 영화촬영이 시작될 무렵 남한에서 4.19혁명이 터졌다. 국립영화촬영소에서는 발 빠르게 4.19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의한다. 그 책임은 노련한 영화감독 강홍식이 맡았다. 강홍식 연출로 제작된 <항쟁의 서곡>(1960)에 김연실은 4.19혁명에 앞장선 대학교수(심영 분)의 부인 역을 맡았다. 


1960년 김연실은 <항쟁의 서곡>과 <6남매>, <불사조> 등에 출연했다. 이중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할머니로 등장한 <6남매>는 관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1961년 여름 원산의 해수욕장으로 휴가를 갔을 때는 야영을 온 소년단원들이 몰려들어 “6남매 할머니, 할머니” 하며 환영해 준적도 있었다. 


천리마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작되는 영화도 많아지고 출연하는 영화의 수도 늘었다. 대표적인 작품들만 꼽아도 <붉은 꽃>(1963), <땅을 지키는 사람들>(1963), <적후에서>(1964), <고향의 자랑>(1964), <청년전위>(1965), <옥화>(1965), <할아버지의 심정>(1967), <유격대의 오형제>(1968), <안해의 일터>(1970), <처녀이발사>(1970), <한 자위단원의 운명>(1970) 등에 출연했다. 


1960년대 후반 들어 조선예술영화촬영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선전선동부 일을 책임진 김정일에 의해 영화인들에 대한 사상개조운동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시나리오작가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어 김연실이 소속된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김연실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나마 그녀가 맡았던 역이 할머니 역이라 강홍식이나 문예봉처럼 중책을 맡았던 동료들처럼 촬영소에서 쫓겨나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많은 원로 영화인들을 촬영소에서 내보냈지만 김연실은 영화계 원로로 대우해주었다. 1970년 김정일의 지도로 영화인들이 출연하는 단막극 <우리가 사는 집>의 공연 연습 중 김연실의 계속된 실수에 함께 참여하고 있던 영화인들이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서 김정일은 다른 사람들의 작은 실수까지 끄집어내 지적했지만 김연실만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책하지 않고 따로 불러 김일성 앞에서 하는 공연에는 실수를 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연실은 1970년대 내내 북한영화에서 할머니 역으로 출연했다. 대표적으로 <그들의 교훈>(1972), <꽃 파는 처녀>(1972), <한 의학자의 길>(1973),  <잔치날(도시편)>(1974), <북은 내가 치겠소>(1977), <운전수집 새 며느리>(1978), <백두산>(1979) 등에 출연했다. 당시 북한의 관객들은 김연실을 “우리 할머니”라 불렀다. 


김연실은 1977년 인민배우의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하여 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1978년 3월 김정일은 김연실이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것을 알고는 인삼, 녹용, 산꿀 등 수십가지 희귀한 보약들을 선물했다고 한다. 


배우는 은퇴가 없다지만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보니 영화출연도 차츰 뜸해졌다.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있던 1984년 4월 중순이었다. 남한에서 유명한 영화감독과 여배우가 월북했다는 소문이 봄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누군지 궁금했다. 남한에 남은 두고 온 딸 계자와 자식처럼 애처롭기만 한 동생의 소식을 알고는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이제는 노인이 된 문예봉, 문정복, 엄미화, 김선영, 남궁련, 유경애 등 왕년의 여배우들이 대동강변의 냉면집 청류각에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이때 문이 열리고 촬영소의 책임자들이 남한에서 왔다는 감독과 배우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모습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최은희였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최은희에게 달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눈물이 쏟아졌다. 최은희가 데뷔하던 당시 그녀를 동생처럼 챙겨주던 문정복과 셋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김연실은 “잘 왔다.. 잘 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보는 눈이 많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아쉬웠다. 최은희는 조만간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헤어졌다.


얼마 후 최은희가 집으로 찾아왔다. 커피 향 가득했던 낙랑을 기억하고 싶었는지 커피와 설탕을 가져왔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예뻤다. 최은희는 김학성과 이혼하고 신상옥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동생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서울에 남겨둔 딸 계자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었다.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을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노인들만 살던 작고 조용한 아파트에 오랜만에 이야기꽃이 피었다.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이 <탈출기>를 촬영하는데 출연할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연실은 어떤 역이든 맡겨만 달라고 했다. 최은희는 김연실의 불편한 다리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연실은 최은희에게 신감독과 꼭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강력히 어필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돌아가는 최은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으로도 의욕이 솟았다.


김연실은 북한에서 재건된 신필름에서 제작한 <탈출기>에 출연했다. 평생을 해왔던 연기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소중했다. 촬영장에 누구보다 먼저 와 준비했고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연습했다. 김연실을 바라보는 후배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뒤이어 <소금>을 비롯해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이였다. 촬영장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얼마 후 최은희, 신상옥이 사라졌다. 북한을 탈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연실은 <림꺽정>에서 참대밭 할머니 역을 맡는 등 말년까지 카메라 앞에 섰다. 남편 김혜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은퇴하였지만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임수경이 방북했을 때 <통일의 꽃 림수경>이라는 유화를 그리기도 했다.


김연실, 김혜일 부부는 자식 없이 말년까지 함께 살았다. 의지할 곳은 부부뿐이었다. 그래서 더 오래 살았는지도 모른다. 김혜일은 1994년 8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김연실도 1997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였다. 길고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 에필로그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 탱크가 시내로 들어왔다. 명동으로 인민군복을 한 연예인들이 들어왔다. 어머니 김연실과 아버지 김혜일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어린 동생과 함께 평양으로 갔다. 큰 딸 김계자는 이웃집에 맡겨졌다. 


전쟁이 끝났다. 주한미군에서는 전쟁 중 미국에서 위문 오던 연예인들을 대신하여 한국인으로 구성된 전속 쇼단을 확대하기로 결정한다. 쇼비즈니스 회사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목소리가 곱고 노래도 잘 부르던 김계자는 미8군쇼 오디션을 봤다. 결과는 더블A였다. 최고등급인 스페셜A 다음 등급으로 미8군쇼 전속 가수로 뽑힌 것이다. 


김계자의 데뷔 무대는 박단마쇼였다. <아리랑 목동>으로 유명한 박단마는 당시 미8군쇼를 주름잡던 유명가수였다. 김계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박단마쇼에서 나와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미군부대를 다니며 공연을 펼쳤고 미8군쇼 최고의 인기 가수로 이름이 점점 높아졌다. 소속회사에서는 그녀를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보내 활동하도록 한다. 1960년 8월 한국을 떠난 그녀는 일본과 동남아, 오키나와를 순회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63년 3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귀국을 맞아 5월 시민회관에서는 미8군쇼단이 총출연한 성대한 쇼를 일반에 공개했다. 이어 1964년에는 음반도 발매했다. 김계자의 이름이 대중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녀의 노랫말은 당시 대중들에게 자극적이었다. 가사 심의를 맡은 어떤 이는 그녀가 부른 <어쩌면 좋아>의 경우 전체를 개작해야 할 정도로 육감적이고 노골적이고 자극적이라는 평을 할 정도였다. 


김계자는 미8군쇼와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위문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러던 중 1970년대 초반 미국인과 결혼을 하고 고국을 떠났다. 그녀가 미국으로 간 이유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대중음악에 대한 간섭이 노골화되자 그녀의 노래를 퇴폐적이라고 낙인찍는 상황이 답답해서였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월북영화인 김연실의 딸이라는 점이 남한에서의 삶을 살아 내는데 있어서 큰 고역이었던 것도 있었다. 


미국생활은 고향을 더욱 생각나게 했다. 서울서 연예인들이 미국을 방문한다고 할 때면 마중 나가 그들을 만나 서울 소식을 들었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신카나리아 같은 분도 있었다. 1986년 북으로 갔다던 최은희가 탈출해 미국으로 왔다. 한때 외숙모와 조카 사이였다. 미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어 바로 만날 수 없었다. 최은희를 다시 만난 건 그녀가 북한을 탈출하고 10여년이 지났을 때였다. 


최은희를 만난 김계자는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는 많이 늙으셨죠?”


최은희는 어머니가 관절염으로 고생하긴 해도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정정하다는 말을 전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최은희는 시민권자는 북한을 방문할 수 있으니 북한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김계자는 자신이 미군부대에서 가수로 활동한 것이 혹여 어머니에게 누가 될 것 같다며 말을 흐렸다.


평생을 배우로 산 김연실은 북한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영화 <승냥이>에 출연하여 야수 같은 미국인 여자 역을 연기했다. 이 무렵 남한에 남겨진 딸은 그 미군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 생계를 이었다. 한국전쟁 중에 헤어진 모녀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비운의 한국근현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관통하듯 지나갔다. 


https://youtu.be/3iOhpFAEli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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