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4.
보성고보 졸업반이던 조중곤은 문예잡지 『생장』의 현상모집에 단편 「절교」를 투고하여 당선된다. 1925년 『생장』 5호에 실린 이 작품에 대해 윤기정은 '친구 사이에 한 여성을 중심으로 얽혀진 애정 때문에 배신행위를 함으로써 절교를 선언하는 이야기가 대체 인민들에게 무엇을 준단 말이며, 제국주의자들에게 대항해 떨쳐 일어선 노동자, 농민들의 현실을 왜 외면하는지, 문학은 이들 노동자, 농민들을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응당한 해답을 주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예술지상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는 식으로 합평회 자리에서 준엄하게 꾸짖었다. 조중곤은 윤기정의 말을 곱씹으며 일견 공감되는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해 8월 서울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출범했다.
조중곤의 작품에 대한 합평 이후 윤기정의 활동 흔적은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카프 창설 당시부터 회원이었다는 주변 인물들의 일관된 증언을 생각해 본다면 카프 발기인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카프의 창립 회원으로 있으며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적극적인 외부 활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이 무렵 그는 개인적인 큰 변화에 직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남으로서 고보를 졸업한 상황인지라 가업을 이어받기 위한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해야 했을 것이고 나이로 보았을 때 집안에서 나서 결혼 상대자를 구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정들을 생각해 보면 카프가 출범했을 무렵인 1920년대 중반 그는 바쁘게 일을 배우며 결혼을 앞두고 있었거나 이미 결혼했을 것이다.
참고로 윤기정의 차남 윤화진(1936년 생)에 의하면 모친의 성함은 민거복이며 외조부 민홍식은 남대문에 근거지를 둔 대표적인 거상으로 ‘종로에 박흥식, 남대문에 민홍식’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윤기정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문예시대』 1927년 1월호에 실은 단편 「새살림」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작품은 노동자 합숙소를 배경으로, 조중곤의 작품을 비평하면서 말한 노동자, 농민들을 어느 쪽으로 이끌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어 1927년 3월, 김화산의 글을 반박하는 「계급예술론의 신전개를 읽고」를 『조선일보』에 게재했다. 맑스주의에 입각한 무산계급 해방 문학을 비판한 김화산의 글에 대한 논박문이다. 윤기정은 김화산과 같은 카프 안에 잔존한 아나키스트 그룹에 대해 맑스주의에 입각하여 공격했고 이는 한설야 등의 글로 이어졌다. 결국 카프 내의 아나키스트 그룹은 제명처분되었다.
흥미롭게도 김화산 등 아나키스트 그룹에 대한 비판 활동이 전개되던 당시 윤기정은 일본 교토에 있었다. 「새살림」이 실린 『문예시대』 1927년 1월호에는 윤기정의 또 다른 글인 「두 토막글」이라는 잡문이 실려 있다. 이 글은 1926년 12월 2일 경원(京園)에서 작성했다고 적어두었다. 교토 쿄엔(경원)은 일본 교토의 중심 지역이다. 또한 1927년 3월 『조선일보』에 실린「계급예술론의 신전개를 읽고」는 교토에서 1927년 3월 20일에 썼다고 적어 두었다.
윤기정은 왜 교토에 있었던 것인가? 같은 시기 교토에 있었던 윤기정의 지인 중에는 심훈이 있다. 심훈은 이경손 연출의 <장한몽>에 이수일 역으로 출연한적이 있었다. 1926년 3개월 넘게 병석에 있으며 『동아일보』 지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했다. 하지만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에 이어 영화로 만들기로 한 이 작품에 대해 일본인 제작자가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제작을 거부하고 나운규의 <풍운아>를 제작하면서 실의에 빠졌다. 1927년 초 교토로 건너간 그는 <장한몽>을 찍으며 알게 된 강홍식이 배우로 있던 닛카츠 타이쇼군촬영소의 연구생으로 입사하였다가 3개월 정도의 연구생 생활을 마치고 5월 8일 조선으로 돌아 왔다. 이처럼 윤기정이 교토에서 머문 시기는 심훈과 비슷했다.
신문예와 염군사 그리고 카프의 동인으로 함께 활동한 이 둘의 행적을 보았을 때, 이들은 조선에서부터 같은 목적을 가지고 교토로 갔을 것이다. 교토에서 함께 지내며 많은 생각을 나누었을 것이며 그 생각을 조선으로 돌아와 실행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으로 돌아온 윤기정과 심훈은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이끌고 있던 안종화와 함께 1927년 7월 영화인회를 조직했다. 연쇄극시절부터 조선영화계에서 활동한 안종화는 심훈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1927년 3월, 영화제작을 위해 조직한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유명무실한 가운데 안종화 혼자 협회를 지키고 있었는데, 윤기정과 심훈은 그 조직의 활성화를 1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인 모임을 마련하여 영화 합평을 하는 한편, 순차적으로 지상에 개별적인 영화평론을 발표하기로 한다. 이 모임은 심훈, 이구영, 안종화, 나운규, 최승일, 김영팔, 윤기정, 임원식, 김철, 김기진, 이익상, 유지영, 고한승, 안석영이 회원이었으며 심훈, 이구영, 윤기정이 간사를 맡았다.
명색이 예술동맹이었지만 카프는 문학인 중심의 조직이었다. 여타의 예술 장르의 참여가 시급한 상황에서 1927년 1월 카프에서는 직속 극단으로 불개미극단을 조직했다. 김동환, 김기진, 박영희, 조명희, 김복진, 안석주 등이 주도한 이 극단은 민중의 감정과 지능을 유도 계발하고 장차 다가올 문화 형태의 창조를 목적으로 했다. 또한 매 1회 시연과 수시로 공연을 예고했으며 이를 위해 다수의 회원을 모집하여 회원들이 실연할 때마다 1원씩을 납부하여 물적 토대를 만들려고 했다. 제1회 시연작으로 카렐 차페크 원작, 박영희 번역의 <인조인간>과 루나찰스키가 쓴 <해방된 돈키호테>를 준비하고 회원 중에서 배우도 선발하여 연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각본 검열에서 공연 불허 처분을 받았으며 여기에 예상했던 것 만큼의 회원을 모집하는 데에 실패하면서 운영자금의 부족을 이유로 문을 닫는다.
카프 직속의 불개미극단이 만들어졌을 때 윤기정과 심훈은 교토에 있었다. 이 둘은 레닌이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여타의 예술보다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인회의 구성은 심훈, 최승일, 김영팔, 윤기정, 김기진, 이익상, 안석영 등 카프의 핵심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외 이구영, 안종화, 나운규 등 조선 영화계의 핵심 인물들이 참여했다. 여기에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 안종화를 돕고 있던 김유영(김철)이 포함되었다.
영화인회 조직을 계기로 안종화가 이끌고 있던 조선영화예술협회는 연구생을 모집한다. 20명 모집에 80여 명이 지원하였다. 나이도 40대에서 막 고보를 마친 10대 후반까지 다양했다. 영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윤기정은 카프의 영화 부문을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종화에게도 카프에 가입하기를 권했으나 그는 완곡히 거절했다. 영화 촬영으로 바쁜 심훈과 나운규 등은 영화인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으나 윤기정은 고군분투하고 있는 안종화를 도와 연구생들의 멘토 역할을 맡았다. 나운규가 촬영하고 있는 로케이션 장소로 안내하여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참관시키기도 하고 비가 와 영화촬영이 불가능할 때는 나운규를 초청해 연구생들에게 특강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연구생들의 많은 수는 윤기정을 따랐다. 이중 마땅한 거처가 없었던 임화는 아예 윤기정의 집에서 생활했다. 1927년 9월 연구생 중 김유영, 강호, 서광제, 임화, 추민 등이 윤기정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