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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노 Jan 24. 2021

고슴도치의 딜레마

- 프란츠 카프카, 변신

편의점 알바가 점주나 손님의 갑질에 의하여,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편의점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쉽게 때려치운다. 그리곤 다른 편의점을 알아보거나, PC방 알바를 하면 된다. 아무런 부담이 없다. 어차피 편의점알바는 내 인생에 그냥 지나쳐가는 먼지 한 점에 불과하다. 반면, 퇴직 통보를 받은 대기업 사원과 태움으로 사내 괴롭힘을 당하는 대학병원 간호사는 잊을만하면 자살 뉴스가 뜬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를 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불합리에 저항하여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게 안될 때도 있다. 이 회사를 그만두면, 가족은 기존에 살아왔던 생활수준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런 삶의 질 저하를 처자식에게 통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와 지원을 받고 모두가 좋다고 하는 대학병원에 입사했는데, 선배들이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그만둘 수가 없다. 나쁜년들에게 한방 먹이고 쿨하게 퇴사해버려야 하지만, 사고 회로가 거기까지 돌지 않는다. 이미 너무나 큰 중압감에 눌려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나만 바라본다. 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 퇴사는 선택의 카드에 놓여있지 않다. 이 괴로움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받는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도 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가족들은 모두 건강한 멀쩡한 사람들이었지만 일을 하지 않고 그레고르만을 의지했다. 그레고르는 돈 벌어오는 ATM기였다. 가족들의 무거운 기대와 정신적인 업무 스트레스,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억울함과 혼자라고 느끼는 고독은 그레고르를 고통과 불안에 떨게 했다. 이 불안감과 부담감은 무거운 추가 되어, 그레고르를 짓눌렀다. 짓눌린 그레고르는 그렇게 벌레로 변신 아닌 변신을 하였다.


<변신>은 인간소외와 고립에 관한 소설이다. 가족을 부양하던 가장이 더 이상 돈을 못 벌고 히키모코리가 되어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로 산다면,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그것은 벌레와 진배 다름없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방문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비록 벌레일지라도 세상과 소통하고 가족들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세상은 벌레를 품어주지 않았다. 가족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 어떤 존재보다 고독하게 죽었다.


그레고르가 방문을 열었을 때, 가족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권고사직 통보를 받은 이과장에게 당장 힘들어도 허리띠 졸라매며 살면 괜찮다고 나도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말해주었다면, 태워지는 김간호사에게 병원에서 힘든 일 없냐고 힘들면 관두라고 엄마 아빠가 먹여 살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누구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나는 사실 인간들을 혐오한다. 그들의 역겨운 이중성에 질려버렸다. 겉으론 좋은 사람인척, 친절을 베푸지만, 뒤에선 뒷담화를 하며 검은 속내를 드러낸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해지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약자에게 폭력을 가하고도 어떠한 부끄러움이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이 어찌 되건 상관없다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에 신물이 난다. 어쩌면, 그들이 먼저 나를 밀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먼저 배척을 당하고도 눈치채지 못하고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타인은 마음의 문을 닫고 만남을 회피하며,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그러나 나와 가장 가까운 인간,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다. 내 안에 어둡고 더러운 것이 있다. 입 안의 침이 너무 불결하고 역겨워 삼킬 수가 없다. 욕지기가 올라온다. 그 역한 것을 한시바삐 뱉어내고 싶었다. 캬악하고 우웩하고 별 별짓을 다 해본다. 하지만 나오지 않는다. 눈은 충혈되고 눈알이 뽑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구토질에 신물이 올라온다. 괴로움과 메슥거림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고통이 가시고 눈을 떠보니, 그것은 이미 내 몸과 하나가 되었다. 분리할 수가 없다. 어리석음, 나약, 나태, 오만, 탐욕, 시기, 분노, 증오의 마음이 나를 지배한다.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고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나는 이미 무너지고 더럽혀진 몸이었다.


추운 날씨에 고슴도치는 가까이 붙어 서로를 따뜻하게 하고 싶어 하지만 서로의 바늘 때문에 접근할 수 없다. 다가갈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른다. 인간사회의 인간들 또한, 서로가 필요한 고슴도치들이라, 서로 함께이고 싶다. 그러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고 서로 거리를 둬야만 했다.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이 찔리지도 않은 거리를 찾은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다. 사실은 가까이 가고 싶었다. 상처 입을 것을 알고도 다가가고 싶었다. 가시에 찔리는 고통보다 추위가 더 무섭고 괴로웠다. 힘을 내려고 했다. 다가가려 했다. 내가 가시에 찔리는 고통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가시로 상처 입을 너를 바라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버틸 수 있는데 너도 괜찮겠냐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마 고통까지 나누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분명, 나의 가시가 살결을 찌르고 새빨간 피로 덮게 할 것이다.


오늘도 고슴도치는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 채 그렇게 홀로 외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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