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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 Eun Cho Apr 08. 2020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카페 한라산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해녀박물관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201번 버스를 탔다. '만장굴 입구' 정류장에 내렸는데, 진짜 입구는 정류장에서 2km 넘게 가야 나온단다. '맞아, 우리 대학교 지하철역도 말이 입구였지. 버스로 20분은 가야 했었어.' 이번에도 속아버렸다.



환승을 할 수 있는 버스가 하나도 없어서 체념하고 내 두 다리만 의지하고 가야 했다. 거의 30~40분 동안 쭈욱 걸어가야 했다. 무척 지루하고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만장굴을 향하는 길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했다.



길 양쪽으로 우거진 나무들, 넓은 들판과 길 위에 세워진 핑크 오토바이,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 심심하지 않게 나와 함께 해준 이 친구들 덕분에 만장굴까지 넉넉히 도착할 수 있었다.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길에서 노래도 불러보고, 소리도 쳐봤다.


그때 내게 뭔가 '자유함', '해방감', '쾌감' 같은 게 느껴졌다. '아무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때 느끼는 감정'이 느껴진 것 같았다.  나는 언제부턴가 '매여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적 위치에서 오는 압박감,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하는 부담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책임감 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군가가 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내겐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매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게 되고, 굳이 매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자유하다.


어느새, 진정한 만장굴 입구에 도착했다.


만장굴,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이자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써, 거문오름에서 솟아오른 용암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천연동굴 중 최초의 천연기념물이기도 하다. 동굴의 총길이는 7.6km인데 개방된 구역은 입구에서부터 용암석주가 있는 곳까지 1km 정도이다.


매표를 하고 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조금 무섭다. 조명이 어두워 발을 잘못 디딜까 봐, 물에 발이 닿을까 봐, 조심 조심히 걸어야 했다. 몇 분 걷다 보니 곧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깜깜한 동굴을 계속 걸어가는 데 중간중간 안내 팻말이 있다. 용암으로 만들어진 생성물들과 동굴의 형태 생성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어 좋았다. 모르고 보는 것보다는 알고 보는 게 더 흥미롭지 않은가.



길 중간에 만난 제주도의 형태를 닮은 거북바위와 용암 가닥이 겹쳐서 형성된 용암발가락이 특히 재미있다.


거북바위
용암발가락

관람 구간의 끝엔 돌기둥이 하나 있는데 이게 바로 용암 석주이다. 이 석주의 높이가 7.6m 정도 되는데 형형색색의 조명을 받고 있어서 색깔이 계속 변한다.


용암석주

석주까지 왔다면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한다. 다른 길은 없고 똑같은 길을 돌아가야 해서 멈칫하게 되었지만, 순간 '혹시 아까 지나가다 보지 못한 게 있었다면 새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나가는 곳에 도착했다. 동굴을 탐방하는 시간은 50분이 걸렸다. 거의 한 시간 만에 나온 바깥세상은 여전히 좋은 날씨였다. 아까 막 도착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만장굴 입구 주변에 꾸며 놓은 나무와 꽃, 조형물들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12~2월에 와야 볼 수 있는 동백꽃도 누가 모아두었는지 돌 위에 예쁘게 모여져 있고, 제주의 상징인 돌하르방도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늠름하기만 하다. 정든 이곳을 뒤로하고 이제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



꽤 오랜 시간을 걸어서 그런지 다시 정류장까지 나가는 길이 너무 길게만 느껴진다. 지친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트럭이 내 앞에 멈춰 섰다. 트럭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대뜸 뒤에 타라고 하신다.


"네? 저요?"

"트럭 뒤가 좀 지저분해서 미안해요. 걸으면 다리 아파요. 타요."

"감사합니다!"(주저 없이)

"아저씨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셨어요?"

"저는 두릅을 캤죠. 오늘 저녁에 두릅 데쳐서 고기 구워 먹을라고요."

"우와.. 진짜 맛있겠어요. 대박."



뒷자리에 있는 봉지에 든 두릅이 거진 3kg 정도는 되어 보인다. 아저씨 말씀으론 1kg에 2만 원 한다는데 그럼 6만 원 정도 되는 양이었을까? 아저씨가 해맑게 웃으시면서 오늘 저녁 메뉴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지어졌다. 누가 시켜서 하는 리액션이 아니라 순수한 반응이 나왔다. "캬.. 맛있을 거 같아요." 흠.. 어디 가면 두릅에 삼겹살 구워 먹을 수 있을지 찾아봐야겠다. 너무 궁금한 조합인데!


아저씨의 저녁 계획을 들으니 평소에 생각했었던 '소확행'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가 2년 전쯤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취업과 결혼, 집 장만 등 이루기 어려운 행복을 찾기 힘든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작지만 확실히 가질 수 있는 행복인 '소확행'의 열풍이 일었다.


나는 직장을 다니며 동료들과 '소확행' 리스트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했었다. 예를 들어, 회사 앞에 있는 테이크 아웃 커피숍에서 출근시간에만 무료 사이즈업을 해주고 누텔라 잼과 토스트를 무한 제공해주는 것에 감동하고, 점심시간 땡 치자 마자 달려가 회사 근처에 있는 맛집을 줄 서지 않고 바로 먹을 때에 행복해한 것, 그리고 하루 종일 업무에 지쳤던 어느 날, 회사 앞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핫도그 노점'에 가서 천 원짜리 핫도그를 동료와 나눠 먹으며 행복해했던 것들이 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소확행'이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이 최고의 행복인 것 같다.


트럭 아저씨가 버스가 자주 다니는 김녕해수욕장까지 데려다주셨다. 너무너무 감사했다. 김녕에서 출발하여 평대리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 평대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20분을 걸어가며 동네 마을 다 구경하고 난 뒤에 식당에 도착했다.



명진전복,
해안 도로를 따라 쭉 펼쳐져 있는 해변이 장관이다. 그 앞에 해변이 보이는 이 식당이 딱 있다.



주메뉴는 전복돝솔밥과 전복구이다. 나는 전복돌솥밥을 주문하고 나오길 기다리는데 옆에 전복 구이 버터 냄새가 장난 아니다. 다음에 꼭 먹어보련다. 사장님이 서비스 고등어구이 반찬도 주셨다. '웬일이야. 나 오늘 생일인가 봐.'이런 느낌이었다.



내 오른쪽 테이블에 외할머니-엄마-딸, 3대가 여행을 왔나 보다. 딸아이는 전복 구이를 엄청 좋아하는 모양인데,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본다. (전복구이가 꽤 비싸긴 한 터라.)

"전복 먹고 싶어?"

"으응."

"그래, 먹자. 언제 또 먹어보겠니~!"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먹고 싶은 건 먹게 해 주셨던 부모님 생각이 났다. 여행을 가면 제일 맛있는 걸 먹게 해 주셨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건 '다른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는 것'보다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 보다 조금 더 큰 어른이 되면, 나도 나의 자녀가 먹고 싶은 걸 먹게 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 졌다. '힘내야지. 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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