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일을 갓 넘긴 애인을 물끄러미 보면 화끈거릴 때가 많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나 싶었기 때문이다.
쿠폰 도장 찍듯이 만나봐요
믿기지 않겠지만 저 유치한 말은 내가 했다. 머리를 쥐어 뜯어봐도 정말 오글거린다.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요즘 초등학생도 저런 식의 고백은 안 했을 거다. 과거의 나년! 하면서 입을 꼬매고 싶은 심정이다. 여하튼 이 말의 시작은 소개팅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작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별생각 없이 나간 소개팅 자리였다. 기대감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의 카톡을 해보니 그냥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 분이구나? 싶은 정도. 1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한 언니가 회사 동료라고 소개해줬는데 크게 마음이 가진 않았다. 예의상 적당히 밥 먹고 집에 와야지 싶었다. 늦여름 기온이 등과 겨드랑이를 적시고 있을쯤 영등포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사진과 실물은 큰 차이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점잖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긴장을 많이 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디 가서 시원한 맥주나 진하게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동안 해온 소개팅 빅데이터에 의하면 저녁 8시 이후 만남은 분위기 좋은 바나 예약해둔 식당이 대부분이었다. 어디 갈까요? 근처에 뭐가 있던 거 같은데..라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대답했다.
"저.. 제가 알아본 데가 있는데 가실래요?"
네이버 지도를 켠 그가 긴장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어디든 가겠지 싶어서 따라간 곳은 맥주 펍. 그 순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던 것 같다. 이런 곳을 알아오다니. 신발 벗고 의자에 앉아 미친 듯이 마셔도 될 거 같은 굉장히 힙한 펍이었다. 맥주는 종류별로 있고, 신나는 음악도 있고. 애주가인 내게 너무나도 어울리는 곳. 맞춤 슈트를 찾은 기분이었다.
시원한 맥주를 거하게 들이켜니까 대화는 자연스럽게 터졌다. 무슨 일을 하는지, 지난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창 시절에 무엇을 했는지, 살면서 어떤 게 제일 힘들었는지, 세상 사는 게 어쩌고저쩌고.. 여기까지 보면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난 기쁨의 도가니가 열렸을 뿐, 특별히 이 사람이다! 싶었던 건 없었다. 하지만 이 한마디에 나는 와르르 무너졌던 것 같다.
"저 고양이 키우는데 보실래요?"
삼색 고양이, 까만 고양이. 이 두 마리가 내 마음을 제대로 훔쳤다.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를 키우시다니. 게다가 묘연으로 이어졌다니. 누군가가 이상형을 만나면 종이 울린다던데, 그날 그 펍에서는 고양이 소리가 제대로 울렸다.
"얘는 몇 살이에요?"
"묘랑이는 7살이고요, 깜장이는 두 살 어려요"
"이름이 왜 묘랑이, 까망이죠?"
"묘랑이는 고양이 아가씨라는 뜻이고, 까망이는..."
"까망이는?"
"그냥 까매서요. 새까매서 까망"
살면서 제일 크게 웃었다. 내 웃음이 좋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고양이 이야기를 한참을 늘어놓았다. 인생이 어두웠던 시절 만난 묘랑이를 시작으로 고양이를 구조하러 다녔단다. 몇 마리는 치료해서 다른 집으로 보내고, 그중 인연이 된 까망이를 들였다는 것. 그가 말한 묘연은 들을수록 흥미로웠다. 그리고 우리가 묘한 인연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매력적이라는 건 순전히 나의 편견이다. 그가 좋았기 때문에 고양이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내 귓가에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정확하게 들렸다. 왠지 이 두 마리를 안고 같이 사진을 찍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 볼이 약간 후끈후끈한 상태로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숫자 있어요?"
"음..."
"100은 너무 많고.. 아니다 10 이하로!"
"그럼 10이요"
"아니! 열 번은 너무 많잖아요"
10번 만나보고 결정하는 건 너무 했다는 앞선 내 생각이 튀어나왔다. 썸을 그렇게 오래 타는 건 좀 그렇잖아요, 한 번에 결정합시다. 사람이 너무 안 만나도 그렇고, 너무 만나도 그렇고. 암튼 짧고 굵게 만나서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는 애프터를 신청할 마음이 없었는데 나 혼자 앞서 나간 걸 수도.
"아 그럼 5번?"
"그래요 좋아요"
곧바로 펜을 꺼내 영수증에 쿠폰을 만들었다. 만나는 날짜도 적고, 만날 때마다 체크하기로. 그리고 마지막 날 사귈지 말지 결정하자고.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미친놈이 따로 없다. 술김에 한 행동치 곤.. 나는 참 치밀했고, 김칫국을 제대로 여러 사발 마신 사람 같았다.
"아니 근데 이렇게 도장 찍어야 해요?"
"도장은 약속인 거예요. 막 기약 없이 시간 끄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미친 X이다. 싶었을 텐데 애인은 껄껄 웃으면서 내가 영수증에 쿠폰을 만드는 동안 지켜봤다. 뭘 하고 싶은지도 같이 적어주면 좋겠다고 거들었던 듯하다. 다음날 아침, 속으로 욕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내가 이불속에서 뻥뻥 발을 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잘 잤어요?"
그런 내가 웃겼을 법도 한데 애인은 그때를 떠올리면 그저 귀엽단다. 콩깍지가 언제 벗겨질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끔씩 이불을 뻥뻥 차고 싶을 만큼 나는 많이 부끄럽다. 그리고 그런 흑역사를 박제시켜두고 싶었던지 한동안 애인의 카카오톡 배경화면은 내 영수증 쿠폰이었다.
외상 금지, 선불 금지, 만나면 도장 찍어드려요~ 식의 연애는 나도 처음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받아준 그도 대단하다. 여하튼 도장은 다 찍었냐고요? 뭐 다 찍었으니까 이러고 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