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애인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몰랐네"
"그동안 잘 감추고 있었지 큭큭"
입씨름이 여기서 또 붙는다. 날 속인 게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가 웃으면 내가 덤비기 시작한다. 좋은 말 할 때 본색을 드러내시지. 왜 그동안 숨긴 거야. 그래 봤자 넌 이제 내 곁을 벗어날 수 없어. 서로 간지럼을 태우다 격투기 한 판을 벌이면서 하루를 마무리 짓곤 한다. 무의미한 애정 싸움이지만 난 이 싸움이 늘 즐겁다.
근데 나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다?
사계절을 다 겪으려면 아직 하나가 모자란 우리. 이제 곧 일 년을 앞두고 있지만 함께한 시간은 꼭 30년을 넘긴 것 같다. 늙고 병들어서 너에게 와서 미안해 라며 주책맞는 말을 하는 그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조잘조잘 떠들며 내 농의 장단에 비트를 제대로 얹고 나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실력이 늘었을까 싶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분명 처음에는 안 그랬다.
초저가 고품질을 자랑하는 내 개그 울타리에는 발도 못 들일 사람이었다. 매사에 진지하고 농담 한 번을 하려고 치면 푸스스 웃어버리기도 하고, 내가 뭘 얘기만 하고 있으면 '응응'만 시전 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다시 들여다보니 영락없는 소년이다.
"당신 처음에는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이런 사람 아니긴 했지~"
"근데 왜 그렇게 된 거야?"
"널 만나고 나서 그렇게 됐어"
"이게 다 내 탓이라는 거야?"
"책임지란 말이다~"
대화는 언제나 이렇게 삼천포로 빠진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기꺼이 나를 위해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어준 건 정말 전적으로 내 탓(?)이 있기도 하다. 본디 나쁜 버릇은 빨리 배운다고, 흥에 쉽게 취하는 내 템포에 발맞춰 걷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주접스러운 내 단어 선택에도 호탕하게 웃고 넘기기까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웃었을 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테니.
원래 그런 사람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어느새 나를 닮아있는 그를 보면서 뜻하지 않게 위로와 안심, 약간의 책임감 그리고 평생을 '그런 사람'처럼 살게 하고 싶은 내 바람이 샘솟는다. 그런 내 바람이 통한 걸까. 곧장 주변에서는 반응이 빨리도 온다. "요즘 되게 살만한가 봐? 너 원래 안 그랬잖아?" 그렇다, 나 원래 안 그런 사람인데 왜 그런다니.
나 좀 달라지긴 했어
예전 같았으면 상대로 인해 달라지는 내가 싫었을 거다. 내 틀을 함부로 건드는 기분이 들어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모습은 나도 몰랐어! 싶을 정도로 변하는 내가, 균열을 내는 나 자신이 만족스럽다. 어쩌면 온전히 무너질 곳을 찾을 수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밖에서 나는 언제나 평범함을 가장한 채 우울한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살았기 때문이다. 여름 바람이 발끝을 지나갈 때 애인에게 물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변하는 게 싫었거든?"
"그래?"
"근데 요즘은 나이를 먹는 내가 좀 기대가 돼."
그날은 우리가 한적한 술집에 가서 알딸딸하게 소주 한 병씩을 마시고 나온 날이었다. 어른이 무던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과 달리 나이를 먹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쉬운 일 보다 어려운 날이 많았고, 때론 애같이 징징 거리기도 했다. 내 고집대로, 내 직관대로 믿고 살아온 것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겪어야 하는 고난들이 많다는 사실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조금만이라도 틈을 비집고 찾아오는 불행들이 미웠다.
연애도 하나같이 다 말아먹었다. 오래 만났지만 떠나기도 하고, 짧게 만났지만 깊은 상처만을 남기기도 하고, 너무 사랑했지만 사랑해서 져버렸다는 이유로 나는 연애에 신물이 났다. 딱 이만큼 까지만 하자, 이 정도면 돼, 이 정도까지 해왔으면 됐지 뭘 바래- 라며 내 모습을 감추고, 변하고 싶지 않았다.
구 애인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고질병 같은 게으름도, 화가 나면 입을 꾹 닫고 생각하는 고집스러운 행동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이게 난데, 뭐 어쩔 거야?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런 구질구질한 어른의 모습을 누구에게든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된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날에는 울었다고 얘기도 하고, 스쳐간 인연들은 이렇게 덧없나 봐 라며 애늙은이 같은 대꾸도 하면서.
"그거 알아? 나도 그래, 나도 당신 만나고 달라졌어"
계절이 한차례 더 지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문득 애인의 말 한마디가 계절을 뒤흔드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 꽤나 대단한 인물이구나 싶어서 말없이 그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만드는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나도 모르는 나를 만든다. 한평생을 누군가를 깊게 좋아하는 건 어려운 일이테지만 정 붙이고 살 비비며 사는 맛을 알면 그거 또한 사랑이랬다. 유치하고, 촌스럽게 내 사랑이 시작됐다. 그렇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