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 오빠와 산다는 것
여기 방문을 노크 없이 벌컥벌컥 여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
오빠다.
"내가 물어보는 게 귀찮아?"
솔직히 제대로 답한 일은 손에 꼽는다. 오빠에게 대답하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냥 방문을 닫았고, 작년부터 나와 살았다. 이제 문대신 열리는 건 메신저.
"이것 좀 해줘"
주문을 잘못해서 신발 사이즈를 바꿔야 하는데 전화로 물어보고 싶단다. 앱을 두고 반품 신청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왜 또 이러는 걸까. 구구절절 설명을 하려고 핸드폰 자판을 열심히 두들겼다가 결국 보내지 못했다. 대신 반품 처리를 해주고 어떻게 처리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그만 물어봐, 나 지금 바빠'
오빠가 한껏 화가 나서 대답했다. "내가 귀찮냐고!"
오빠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나보고 착한 동생이라고 했다. 오빠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착한 여동생이 됐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착한 동생이 아니다. 한 번도 좋은 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 못된 년이 더 어울린다.
태어날 때부터 못된 년인 나는 오빠와 살기 위해 나쁜 동생이 되기로 맘먹었었다. 그리고 이 다짐을 평생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다. 이기적인 년, 미친년, 지 밖에 모르는 나쁜 년. 순전히 내 멋대로 해놓고선 뭘 오빠를 원망할까. 내 말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 사는 오빠에 비해 나는 여전히 모른 척 문을 닫았다.
엄마는 그런 날 보고 치사한 년이라고 했다. 치사한 년. 그 말에 딱히 대꾸는 안 했었다. 틀린 말이 아니니까. 그래도 나는 오빠의 질문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 다 알아서 해줄 텐데. 뭘 그렇게 자꾸 알고 싶은 게 많은 건지. 작은 상자에 있는 싫어서 나오려는 오빠에게 위험하니 나오지 말라는 내 말들이 얼마나 상처였을지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냥 내가 해줄게
우리 집이 목소리가 큰 집이라는 건 초등학생 때 복도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릴 때 알았다. 종종 아랫집에서 그 집은 목소리가 큰가 봐요~ 호호하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본가에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는 한 톤 높아진다. 순전히 오빠 때문이다.
오빠는 구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심한 열병으로 청각을 잃었을 때 엄마는 작은 학교에 다니면서 오빠에게 구화를 가르쳤다. 말을 배운 오빠는 지금은 말은 잘하지만 어려운 단어나 표현은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작게 얘기할 수 없다.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줘서 얘기해야 하다 보니 목소리가 나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거 신문에서 봤는데 신청하면 할 수 있대.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 서류는 OO구청 가서 물어보면 되고, 우선 신분증이 필요하네"
내가 조금이라도 작게 얘기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쳐다보는 오빠다. 다시 입을 모아 말한다. '구우청에 가아서- 무-울어-봐아. 신분증.. 아니지 주우민- 드으응록즈응 알지? 그거 가. 져. 가' 그럼 질문이 다시 시작된다. 구청에 왜 가야 하는지, 신분증 들고 가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냐, 그냥 내가 해줄게 내일 같이 가"
그땐 몰랐다. 이 말 하나가 오빠를 두렵게 하는 일이 될 거라고.
아무도 안 물어봤잖아
내가 뭘 기억하는지
오빠는 한국 드라마, 영화는 일체 보지 않는다. 자막 송신기를 지역복지센터에서 받아왔지만 몇 번 쓰다 결국엔 반납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없다는 이유가 컸다. TV에 얼마나 재밌는 게 많은데..라고 생각한 건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오빠는 자막이 나오는 외국 만화영화는 즐겨봤다. 등장인물들의 입모양에 맞게 자막이 나온다는 것이좋다는 것. 그런거 까지 봐? 싶었다. 그는 생각보다 세심했다.
"그냥 저거 보면 안 돼?"
내 짜증에도 오빠는 자주 리모컨을 뺏어 자신이 보고 싶은걸 봤다. 남매의 싸움은 늘 별것 아닌 걸로 시작된다. 결국 머리채를 잡고 서로 쥐어뜯으면서 쟁탈전을 벌이다가 오빠가 보고 싶은걸 보곤 했다.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우리지만 내가 나와 살고 난 이후부터는 전쟁은 없어졌다. 오빠는 TV 대신 커다란 데스크톱을 마련해 영화든 뭐든 방에서 보기 시작했고, 나 역시 작은 스마트폰에 의지하기 시작하니 리모컨 전쟁은 막을 내린 셈이다.
어느 주말, 오빠가 TV에서 나오는 옛날 만화영화를 보더니 기억나냐면서 물었다. 내 기억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아니 기억이 날듯 말 듯 한데 말이다. 투닥거린 기억이 전부였던 내게 오빠는 나와 봤던 만화 영화가 무엇인지, 리모컨을 뺏으면 어떻게 우는지, 그때 기분이 나빴었다며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다 기억나지! 아무도 안 물어봤었잖아. 내가 뭘 기억하는지"
한껏 톤이 올라간 오빠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 같이 밥 먹는 거 처음이야
오빠의 기억은 한치의 오차가 없다. 그래서 가끔은 무섭고, 아주 가끔은 내 명치를 세게 치고 간 것처럼 울컥하게 만든다. 8월은 오빠의 생일이었고, 없는 돈을 끌어모아 생일상을 사주겠다고 나섰다. 핸드폰 가게에 가서 요금제를 대신 바꿔주고, 점심을 먹자고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백화점 회전 초밥을 꼭 먹고 싶다고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오빠가 신기하다는 듯이 레일을 쳐다봤다.
"여기선 처음 먹어보네"
회전 초밥을 안 먹어본 건 아니지만 사람이 여럿 모여있는 공간에서는 간단하게 먹고 일어나는 오빠였기에 북적한 백화점이 익숙하진 않다.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된다는 내 말에 신나게 먹는 오빠는 주문도 척척 해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내 생일이니까. 맞다. 오빠 생일이니까 알아서 해야지.
한참을 말없이 밥을 먹던 우리의 침묵을 깬 건 오빠의 한 마디였다.
"근데 너랑 나랑 밥 먹는 것도 처음이야"
뜨끔했다.
"아닐걸. 있어"
아무렇지 않게 아니라고 내가 박박 우겼다. 그렇지만 오빠의 기억이 맞다. 남매가 밥 먹는 게 뭐가 어렵다고 마주하고 둘이서 밥 한번 안 먹었을까. 이내 부끄러운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결국 내가 먼저 수저를 내려놓았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빠는 그날 회전 초밥을 싹싹 비웠고, 내 통장은 텅-장이 되는 수치를 겪어야 했다. 응당 맞는 대가일지도 모르겠다. 그간 좀 못돼먹었어야 말이지. 벌 받는 다고 생각하고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못된 동생의
같잖은 반성일기
그날 이후 나는 오빠에게 잘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와서 잘한다니.. 누가 들으면 이거 정말 미친 x 아니냐 하겠지만 나는 이제야 내가 뭘 실수했는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인척 해왔는지 깨달았다. 어렵겠지만 최대한 잘해주기로 항로를 변경했다. 그간 내 인생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족들에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창피하고 부끄러운 반성일기를 남겨보고자 한다. 서른을 코앞에 둔 지금. 이제 와서 잘해봤자 라는 소리를 들을지 언정, 개과천선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응당 당연히 가족이 해야 할 일을 모른 체 묵혀왔던 나를 온전히 미워할 수 있게. 무엇보다 살아있는 이 시간 동안 오빠와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내가 모르는 기억을 안고 사는 오빠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못된 동생의 같잖은 반성일기를 차곡차곡 기록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