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그래도 살아가는 방식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중 -
늘 미래의 불확실함이 싫었다.
미대를 졸업할 땐 당장 내일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고, 상담자로 일할 땐 평화로운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삶이 언제나 '확신'이라는 명확한 원색이길 바랐지만, 현실은 늘 모호하고 흐릿한 회색 속에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이게 옳은 길인지도 몰라. 그저 이렇게 떠밀려가듯 가고 있어.'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기분에 자주 불안해졌고, 마음속에서 불안함의 사이렌이 울리면 난 늘 옆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는 이들, 이미 선명한 원색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을 보며 초조해했다. 나는 불확실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자꾸만 어떤 것이던 '확신'을 원했다. 언젠가 저들처럼 원색의 무언가로 반짝반짝 빛이 나기를, 그런 미래가 보장된 삶이기를. 하지만 나만의 색을 확신하고 싶은 불안감에 조급해진 나머지, 자꾸만 조금씩 색을 섞었다. 나는 흰색에서 점차 혼탁해져만 갔다.
처음의 순수했던 흰색도 아니고,
강렬하게 자신의 색을 쏟아내는 원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새카맣게 타버린 검은색도 아닌데
확실하지도 않고, 선명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애매한 회색의 빛을 띤 나는 뭘까.
어중간한 상태, 늘 '정답'의 바깥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스스로가 싫어졌다. 왜 늘 뚝심 있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이도 저도 아닌 그런 마음으로 자꾸만 멈춰서는 이유가 뭐야, 대체.
"우리는 '나'라는 내용물이 담긴 그릇을 버릴 수도, 교환할 수도 없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지. '나'에 대한 견해를 바꾸는 것, 쉽게 말해 사용 용도를 바꾸라는 거네."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중 -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가 목표를 향해 뛰어간다고 느낄 땐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갖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을 땐 스스로를 미워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점차 강렬한 원색이 되는 것을 포기하게 되고 어두침침한 회색 속으로 침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서른이 되었다. 그제야 나의 회색이 보였다. 회색도 하나의 색이 될 수 있는데, 나는 왜 새하얀 흰색이 아니라 괴로워하고 새카만 검은색이 아니기에 슬퍼했던 걸까.
미술에서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지만, 빛의 명도를 조절하는 회색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색이다.
상황에 따라 더 밝아질 수도 있고, 더 어두워질 수도 있는 색. 그 누구도 확신하는 미래를 살 수 없다는 대전제 속에서, 나는 비로소 불확실성이 주는 흑백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찰나인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추고, 진지하게 사는 걸세. 과거도 보지 말고, 미래도 보지 말고, 완결된 찰나를 춤추듯 사는 거야.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목적지도 필요 없네. 춤추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중 -
춤을 추는 것과 같이 삶을 살아가는 건 명확하지도, 뚜렷한 결말이 존재하지도 않다. 그저 목적지가 없는 과정 속에서 묵묵히 나아갈 뿐. 그렇기에 무엇하나 확실한 것 없는 회색의 상황에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살아오는 동안 이도 저도 아닌 수많은 회색 점들을 찍어 왔다. 하지만 수많은 이 회색 점들이 모이다 보면, 언젠가 내가 상상치 못한 멋진 그림이 그려져 있을 거라 믿고 싶다. 그 그림의 결과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점을 찍는 '지금, 여기'의 순간들이 이미 완결된 춤이기에.
스물, 그리고 아홉 개의 점을 지나, 이제 서른이라는 새로운 점을 찍은 내가 있다.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는, 여전히 모호한 회색빛 길 위에 서 있지만 더 이상 불안해하고 싶지 않다.
내 안의 회색은, 이미 가장 많은 색을 품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