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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사진을 한 지 12년.

이런저런 나의 사진을 통해 지나온 이야기 part.1

by cococho

나의 첫 페이지.

(2019년에 쓴 글이며, 이제야 2025년에

작가등록을 하여 이 부분만 수정하였고, 다른 글은 2019년에 쓴 글이다.)


그동안 어릴 적의 나는 사실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데 있어서 거침없이 시도를 한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지금은

그게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선뜻 결정하는 데 있어서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리게 됨을 느껴가는 33세의 사진 하는 여자이다.


어릴 적의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좋았고 재밌었다.


나의 부모님은 자식에게 강압적인 부모님은 아니셨다. 나는 부모님께서 나의 삶의 방향을 잡아주시는 과정에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고, 부모님께서 우리 남매를 이렇게 키워주신 방식을 나도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똑같이 고수하고 싶다.


중학교 3학년 초 즈음 아빠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어릴 적부터 나는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았다.

생각하면서 혼자 끄적거리는 그게 너무 좋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아동미술도 잠시 했었고, 그래서 부모님께 "저는 미술을 하겠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미술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마음을 먹고 얘기했다.


아빠는 무언가를 먼저 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나의 그런 면을 좋게 생각하셨는지 진지하게 잘 생각해 보았냐고 물어보시고는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는 돈도 많이 드는 입시미술의 험난한 길에 기꺼이 투자를 해주셨다.

(동생의 스토리도 있다. 동생도 그 시절 진로를 잡아서 지금도 그 길로 걷고 있다. 그건 다음 기회에!)


그땐 몰랐다. 입시미술이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지 나는 자식의 입장이었던지라 거기까지 생각을 못해봤으니까.. 거기에 재수까지...


그렇게 나는 예술을 하고자 발버둥 치며 그렇게 입시미술을 치렀다.


나는 공부는 잘하는 편은 아니어서 그저 하고 싶은 것만 미친 듯이 하고 싶은 아이였다.

중후반 정도의 성적으로 한양대 응용미술학과를 간다는 게 말이 안 됐지ㅋ

목원대 미술교육과를 넣었는데 예비 1번이 되었고 그 예비는 결국 끝까지 빠지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거기 붙었으면 지금 나는 미술 선생님을 하고 있었을까?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서 지나왔을까?

내가 지금 만난 사람들과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겠지?


나는 약간 운명론자다.


그 당시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해서 다시 했으나 난 결국 미술교육과에는 가지 못했다.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실험적이고 현업에 많이 종사하시는 교수님들이 많이 계신 대학에 입학한 후

선택한 학과는 파인아트였다. 거기서 모든 매체를 다양하게 접해봤지..


순수예술 말이다.


페인팅, 판화, 목공수업, 조소, 미디어아트, 사진 그렇게 다양한 매체를 가볍게 탐해봤다.


많은 예술적 지식과 많은 서적 그리고 많은 전시를 그 시절 접하게 되었고, 그게 너무 재밌었고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예술적 지식을 많이 담게 됐던 시기 같다.


그중 나는 사진 수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당시 사진과 그림을 콜라보해서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실 우리 학교에서 사진과 전과가 경쟁률이 좀 있는 편이어서 전과 신청을 했지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전과 시절 얘기를 잠깐 하자면 나 말고 타과에서 전과 면접을 보러 온 너 댓 명 친구들이 사진과 교수님 문 앞에서 차례로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막 카메라 진짜 겁내(?) 큰 거 렌즈도 겁나게 큰 거 끼고 오고 다 하나같이 카메라를 어깨에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지..


나는 약간 거기서 '음.. 뭐지? 경쟁률도 센데 흠.. 이거 되겠나?' 장비빨에 마음이 살짝 움츠러든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지난 사진과 수업 때 촬영하고 인화했던 포트폴리오 작은 책자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들어가서 교수님께 보여주고 담백하게 설명하고 나왔다. 나중에 결과를 확인하니 나와 우리 과에 나랑 친했던 동기 동생 둘이 전과 합격됐다.


성적을 좀 봤나...? 입시 당시 내신과 수능은 별로 안 좋았지만 입학 후에 대학과목 성적은 거의 A정도를 유지했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안 하거나 중간은 유지하자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하는가 보다를 대학 성적을 보고 내가 나를 판가름했다지...


전과 신청서를 낸 것을 함께 다니던 친구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었다.


큰 기대를 안 했어서.. 친구들에게는 얘기도 안 하고 너무 미안하게 된 상황. 얘기도 안 하고 나중에 이런 사실을 다 얘기하니 이해해 줘서 고마웠다.


지금도 간간히 잘 만나고 있는 나의 좋은 동기들..



여하튼 난 운명론자다.


미술 하는 애가 사진 과로 전과? 이건 분명 이유가 있는 거다.

부모님은 오히려 사진과 전과를 더 좋아하셨다.

예술가는 입에 풀칠하기가 쉽지는 않은 직업이고 사진이 좀 더 돈을 벌기가 수월할 거라 생각하신 듯.


나의 운명은 그때 사진으로 노선을 갈아탔다.


그렇게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진 전선에 뛰어들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진의 방향이 사실 상업보다는 작가 양성 위주의 수업이었다.


근데 상업사진도 관심이 있던 터라 상업 수업을 듣고 존경하는 교수님이 된 교수님이 방학기간 광고 스튜디오 인턴을 뽑는데 지원하였다.


나 이외에 몇몇 친구들도 인턴 지원을 했고 나는 운이

좋은 건지 교수님의 스튜디오로 인턴을 나갔고

내 친구들과 다른 친구들은 교수님의 지인 광고 혹은 패션 스튜디오에 인턴을 나갔다.


인턴 때 새로운 경험을 했고, 나는 개인작업을 해서 작가로서 전시를 하고 싶었지만

꽤나 매력 있는 상업사진도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인턴을 마치고 마지막 학기를 열심히 매진했다.



나는 졸업 당시에 교수님께 말했다.


인턴 했던 스튜디오에 들어가고 싶다고 근데 그때 이미 어시스던트 인원이 다 차 버린 상황이라 직원 T.O가 없다고 하셨다.


그땐 그래서 접었다.


그 당시는 졸업작품을 마친 지 얼마 안 돼서 사실 작가가 더하고 싶었다.


그러고서는 일 들어오면 정말 간간히 하고, 개인작업을 계속하고 전시하려고 공모전 넣고 했었다. 아시아프라는 공모전에 당선돼서 전시도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상업 사진 전선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젠 나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현재 그로 인해 상업사진에 한 발자국 발을 들여놓아 로그인을 하였고, 그 대학시절에 사진과 그림을 접목시켜 보겠다는 의지의 개인작업은 실행 안 한 지 오래라 로그아웃 상태다.

언제 다시 로그인과 로그아웃이 뒤바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두 개를 함께 할 때 가장 기쁠 것은 느낌적인 느낌은 확실하다.


아직도 나는 운명론자인 것 같지만 이때만큼 운명론을 강하게 느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때는 잃을 게 없어서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강하게 밀고 나갔던 패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가 좋다 지금이 좋다고 딱 정해서 얘기할 순 없지만 20대 초반의 나와 30대 초반에 나는 결정의 상황이 매우 다름을 알고 인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건데.. 예전에 했던 그 거침없는 선택이 이젠 빠르게 결정 내릴 수 없음이 답답할 뿐이다.


지금 나는 나의 상황에서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현재 가진 게 많지 않지만 20대 초반의 나보다는 그나마 조금 쥐고 있는 걸 놓치지 못할 것 같아서인지 가족의 가장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그것이 그 누구도 나의 어깨에 짐을 주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그 짐을 짊어지고 있어서 지금 도전하는 게 사치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우리 가족에게 다정하고도 길을 안내해 주던 완벽했던 아빠의 무게를 감히 다 느낄 수는 없지만 살아가면서 점점 아빠의 무게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 모르게 포기할 것이 분명 있었을 것 같은 아빠의 그 마음이 저리면서 아프기도 가끔 눈물이 나서 조용히 울음을 삼킬 때가 많다.


이렇게 부모의 마음을 감히 점점 이해하고 알아가는가 보다.


또다시 도전이냐 안락함이냐 그것의 기로에 서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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