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둘. 첫째 열 살. 경사가 났다는데 나는 울고 싶었다. 둘째. 둘째라고요. 난임치료로 유명하여 삼신할배라는 별명을 가진 할아버지 산부인과 의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 나를 봤다. 웃어. 웃어야 돼.
"프흐흐, 네..."
'울면 안 돼. 이 타이밍에 울면 천하에 몹쓸 엄마가 되는 거야. 기뻐해야지. 임신은 기쁜 거야.'
우리는 확고한 외동이었다. 아니다. 나만 확고했나 보다. 첫째가 유난히 잠자리에 예민해서 키우는 내내 힘들었다. 아이가 잠투정을 하면서 세 시간씩 대성통곡을 할 때는 아이도 울고 나도 울고 하늘도 울고 아 슬프다 하면서 지쳐갔다. 첫째는 열 살인 지금까지도 잠자리독립을 못했고, 낮잠은커녕 가만히 누워서 눈감고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아이다. 십 년 만의 임신에 다른 어떤 기쁨이나 설렘도 아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세상에, 나 그거 어떻게 다시 해? 나 자신 없어. 더는 못한다고!'였다.
이번 여름이 두 번째 제주도 한 달 살기였다. 첫 번째는 큰아이가 20개월 남짓일 때. 한 달 동안 제주도 곳곳을 다니며 즐거운 추억도 많이 쌓았지만 제주도라고 해서 아이의 잠투정이 김녕 앞바다처럼 아름다워 지지는 않았다. 큰애의 잠투정은 여전히 폭풍우 치는 마라도 바닷바람이었고, 숨죽이고 엎드려 폭풍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부부는 무력했다. 아이가 크면 다시 오자. 그땐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거야. 꽃 같은 미래를 희망하며 일상으로 돌아와 여러 해가 지났고 이번 여름이 바로 드디어 열린 꽃 같은 미래였다.
아이는 그때 제주가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기억한다
수영장과 잔디밭 뒷마당이 딸린 2층 빌라를 통으로 빌렸다. 지인들을 초대해 수영장에 애들을 풀어놓고 잔디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벌였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앞바다에 나가 스노클링을 했고 태풍이 온다는 날이면 한라산이 보이는 통창 카페에 가서 하루종일 책을 봤다. 반짝이는 제주도 햇살처럼 행복이 뿌려지는 날들이었다.
폭우가 내리고 나면 사라오름에 단 며칠간 물이 찬다고 한다. 일 년에 몇 번 보지 못하는 장관이라서 한 달 살기가 아니면 좀처럼 볼 수 없을 귀한 기회인 듯싶었다. 화산 분화구에 찰랑찰랑 발목까지 맑게 차오른 물을 밟고 싶어서 사라오름에 갔다. 싱그럽게 한라산 줄기에서 쏟아지는 빗물과 함께 안개가 피어올라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는 사라오름을 보며 감탄을 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 둘째가 찾아왔다. 사라오름 기운 찬 아이.
한라산 사라오름은 비온 뒤 가세요
첫째는 본인이 외동인 것이 너무도 행복한 아이였다. 다른 집 아이에게 귀엽다고만 해도 눈을 치켜뜨며 서운하다고 난리를 부리고 한결같이 동생은 필요 없다고 한 아이. 그런 아이에게 동생의 존재를 이야기했을 때의 눈빛은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었다. 그리고 여과 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지금이라도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왜 생긴 거냐고. 우리 가족은 딱 지금 세 명이 좋다고.
우리는 묵묵히 받아주었다.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게 두었다. 서운하면 서운한대로,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 감정을 겪어내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둘째가 백일정도 때까지도 첫째는 둘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째 어때? 둘째 잘 받아들여?"
"가까이 가지 않아요. 만지지 않아요. 쳐다보지 않아요."
"허허허...... 아직 불가촉이구나."
사정을 잘 아는 지인은 걱정했지만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당연히 첫째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남의 집 애는 빨리 큰다는데 손주 같은 둘째는 우리 집 애인데 엄청 빨리 큰다. 내가 빨리 늙고 있는 것인가. 둘째가 9개월인 지금, 첫째가 학교 갔다 와서 제일 먼저 부르는 것은 둘째의 이름이다. 엄마를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살갑고 다정하게.
둘째야~형아 왔다.
어깨를 받쳐주고 뱃살을 등받이로 내주었다.
사십 대 노산에 십 년 만의 임신. 불안감에 피를 말리는 양수검사. 쌀밥 한 숟가락에 치솟는 혈당. 역아. 제왕절개 전날까지 먹은 입덧 약. 한고비 넘기면 또 한고비 아슬아슬 여러 이벤트를 울면서 넘기며 정말 감사하게 둘째는 태명대로 매우 튼튼하게 태어났다. 매일 기도했고 시도 때도 없이 불안했고 순간순간 아이에게 미안했다. 내가 먹는 것, 힘든 것 모두 아이에게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 약하고 늙은 엄마에게 온 아이에게 미안했다. 미안한 마음에 건강하게 태어나기만 하면 설사 형처럼 잠자리가 예민하더라도 다 받아주어야지. 수면교육 따위는 하지 말고 계속 안아주어야지 다짐했었다.
첫째 아이 때는 매일 울었다. 양가도움 없이 오로지 우리 부부가 육아를 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꺼져가는 숯불처럼 점점 사그라들었고 하얗게 재만 남아 흩날려갔다. 다들 육아는 영혼을 갈아 넣어 마침내 나라는 존재는 없어진다고 하여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래도 커가는 아이를 보고 뿌듯하게 견디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그런 시절이 생각나 둘째 임신을 알았을 때 많이도 울었다. 그 모든 감정이 오롯이 되살아나 십 년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이었다.
그런데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다했던가. 나이 든 엄마가 못 견딜 것을 이미 알고 태어난 건인지, 둘째는 졸리면 잔다. 꼬박꼬박 낮잠을 잔다. 당연한 이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다. 게다가 한 번 자면 두 시간을 잔다. 이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첫째를 키워본 우리 부부는 안다. 이런 아이가 진짜 있었다.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라니.
덕분에 요즘엔 둘째를 보면 계속 웃고 있다. 두 시간을 자고 꼼지락 거리는 옹알이가 들려서 가보면 씩 웃는다. 나도 같이 웃는다.
다행이다. 육아가 그렇게 힘들고 매일 울고만 지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둘째를 통해 다시 배운다. 이러려고 우리에게 이 아이가 온건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