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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현 Mar 25. 2018

일상(日常)이라고 늘 같은 날은 아니다.

<패터슨> 영화 리뷰 

 하얀 라운드넥 티셔츠를 입은 한 남자가 아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다. 누운 채로 머리맡 탁상에 놓여 있는 시계를 찾는다. 아직 여섯 시 반이 좀 안되었다. 시계를 손목에 차고, 좀 더 잠자리에 있을 아내에게 몇 차례 키스를 하고서야 일어난다. 전 날 의자 위에 포개 놓았던 옷을 챙긴다. 주방 스툴 의자에 혼자 앉아 시리얼을 먹고, 아내가 챙겨 놓은 도시락을 한 손에 들고 버스 차고지로 출근한다. 


 패터슨은 뉴저지주 패터슨 시(市)의 23번 버스 운전사다. 이른 아침 차고지를 출발해 지난 몇 년 간 한 번도 변하지 않았을 노선을 하루 종일 도는 것이 그의 일이다. 쳇바퀴 같은 일만큼이나 일과 후 일상도 늘 비슷한 패턴이다. 퇴근 후 꼬박꼬박 집에 돌아와 아내와 저녁을 먹고, 밤이면 애완견 마빈과 함께 산책을 나간다. 산책 중에 잠시 마빈을 묶어 놓고 바에 들러 하루 한잔 꼭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 시퀀스.


패터슨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도시와 같다. 


 카메라는 반복되는 패터슨의 하루를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프레임으로 끈질기고도 집요하게 담아 나간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시간은 흐르지만 아무런 사건도,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이 영화 초반부가 최악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잠시나마 탈출하기 위해 영화를 보지만, <패터슨>은 그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영화다.  <패터슨>을 보는 내내 정작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기보다 우리의 일상을 직면한다. 아무런 사건도,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우리의 하루하루를.


 그러나 패터슨은 틈틈이 시를 쓴다. 우리와는 다르게. 어느 날은 식탁에 놓인 성냥갑에 대해, 어느 날은 다른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쓴다. 시를 쓰는 그의 일상은 늘 같지는 않은 날들의 연속이다. 버스에서 얼핏 얼핏 엿듣는 승객들의 매번 대화, 같은 길이지만 매번 새롭게 마주치는 사람들. 빛과 결이 달라지는 주변 풍경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똑같은 것들은 없는. 그래서 패터슨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늘 같지는 않은 날들.

'일상(日常)'이란 말은 항상 같은 날들이라는 뜻이지만 사실 어느 날도 같은 날은 없다. 어쩌면 진부한 것은 우리의 일상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이 아닐까.

  

늘 같은 벤치에 앉아 노트에 시를 쓰는 패터슨


  최근 들어 ‘디지털 노매드’(Digital Nomad)처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며 살아가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참고로 패터슨은 스마트폰이 없어도 세계가 잘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원할 때면 언제나 새로운 일상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 정말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다른 곳에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가능성을 먼저 모색하는 일이 아닐까. 모험과 도전을 꿈꾸기 전에, 패터슨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조금씩 변주해보는 노력을 해보는 건 어떨까. 


 “가끔은 빈 노트가 많은 가능성을 주죠”.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가능성은 그저 ‘빈 노트’에서도 나오는 법이다. 


"Another one day, So far"
(오늘만 날이 아니야, 지금까진)
- 영화 <패터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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