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현 Oct 08. 2019

<에이징 월드>, 우리는 노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에이징 월드> 전시 리뷰

 필립 로스는 그의 소설 <에브리맨>에 이렇게 썼다. “나이가 드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대학살이다.” 로스는 분명히 한 인간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겠지만, 문장 속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 ‘사회’를 두더라도 어색하진 않을 것이다. 고령화가 인류적 재앙을 야기할지 모른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는 지금, 이 문제를 다룬 <에이징 월드> 전시에 가게 된 건 순전히 전시의 영문 제목에 끌려서였다. 고령화 시대 하면 떠오르는 심각한 문제들(경제 활동 인구 감소, 막대한 복지 비용 지출 등)과 달리 전시의 영문 제목 <Will you still love me tommorrow?>(‘내일도 날 사랑해 줄래요?’)은 고령화와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내밀하고 낭만적인 느낌이었다. 영화던, 전시던 제목에 끌려서 관람했을 때의 결과는 보통 두 가지라 잘 고민해야 했다. 진짜 좋았거나, 제목에 속았거나. 다행히 전시가 무료라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미국의 사진가 로렌 그린필드는 노화에 역행하고자 하는 욕구를 투영한 작품들을 촬영했다


 전시는 크게 3개의 섹션, 노화에 대한 현대인의 불안을 다룬 ‘불안한 욕망’(섹션 1), 노인 소외 문제를 다룬 ‘연령 차별주의 신화’(섹션 2), 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는 ‘가까운 미래’(섹션 3)로 나뉜다. 섹션 1에서는 한국 참여 작가인 윤지영과 이병호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윤지영의 <불구하고>는 불멸을 손에 쥘 뻔했으나 단 하나의 치명적 약점으로 인해 쓰러진 그리스 신화 속 아킬레스와 탈로스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영상 작품인데, 강렬한 EDM 사운드가 심각한 얼굴로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들을 묘하게 누그러 뜨린다. 사운드가 어찌나 큰 지 섹션 전체에서 리듬을 타며 관람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윤지영의 작품은 영생에 대한 인간 욕망의 계보가 무려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오래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병호, <깊은 숨> (2011)


 섹션 1에서 관객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작품은 단연 이병호의 조각들이다. 이병호는 평소엔 체감하기 어려운 노화의 존재를 관객들 앞에 재현한다. 그는 실리콘으로 만든 조각상 내 공기 주입기를 활용해 인체가 노화해 가는 과정을 단 20-30초 안에 극적으로 보여준다. 인간과 노화의 관계란 절벽과 파도의 관계와 비슷하다. 파도가 느리지만 조금씩 절벽을 침식시키고 끝내는 무너뜨리는 것처럼, 노화 또한 천천히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끝내는 생의 불꽃을 앗아간다. 물론 이병호의 작품 속 노화는 잔잔한 파도라기보단 무자비한 해일에 가깝다. 관객을 집어삼켜 버리는. 어쩌면 그게 노화의 본질일까? 노화에 의해 집어삼켜지지 않는 인간이란 없으니까.


 노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은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안네 올로프손의 <Will you still love me tommorrow?>는 노화로 인한 신체 변화를 의식하기 시작한 40대 여성들을 모델로 삼아 촬영한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노화의 존재는 영원을 약속하는 사랑마저 위태롭게 만든다. 연애 상대를 고르는 데 있어 외모와 젊음이 주된 잣대가 된 현대 사회에서 노화는 그 자체로 사랑의 적이 된다. 작가는 마치 가뭄에 쩍쩍 갈라진 땅처럼 모델의 얼굴에 검은 펜으로 균열을 그려 넣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작품 속 여성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 속엔 젊음이 영원할 것만 같다고 여기던 활력보단 아름다움의 유한성을 느끼는 체념이 담겨 있다. 아, 우리에겐 정말 선택권이 없는 걸까. 노화를 그저 직시하는 것 밖에.


안네 올로프손,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2004)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부자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영생과 장수를 위한 생명 공학 프로젝트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구글의 자회사 칼리코는 500세 수명 연장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제프 베조스는 노화 방지 약을 개발하는 회사에 1억 불 상당을 투자했다.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 피터 틸은 120세까지 살기 위해 주기적으로 성장 호르몬을 투약하고 있고,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엘리슨은 죽음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경제적 번영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기대 수명을 엄청나게 연장시켰을 뿐 아니라, 노화와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 혹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인류의 전통적 인식마저 바꿔놓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고령화 시대는 노화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겨내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장수라는 인류적 과제를 위해 애쓰고 있는 부자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솔직하게 건강하고 젊게, 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만 젊음을 과도하게 숭배하고 노화를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현대 사회의 시선이 과연 우리를 위해 행복한 것일지 물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 바바라 애런라이크는 그의 저서 <건강의 배신>에서 이렇게 썼다. "죽어도 될 만큼 늙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더 오래 살기 위해 고통스럽고 성가시고 지루한 그 어떠한 일도 자초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나는 잘 먹는다. 맛이 좋고 가급적 오랫동안 배고프지 않을 식품들, 예를 들어 단백질, 섬유질, 지방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나는 운동도 한다. 더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초고령화 시대를 목전에 둔 우리에게 중요한 건 경기 침체나 복지 예산 급증 같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노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에이징 월드'를 앞둔 지금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질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대미술에 무관심하던 대중들이 호크니 전엔 열광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