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잊을 수 없는 사진,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
절대 잊을 수 없는 첫 상업사진의 기억.
by sangillness May 10. 2020
때는 내가 스무 살 무렵.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상업사진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었다.
하지만 돈을 버는 사진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했던 나로서는 나름대로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자주 드나드는 커뮤니티의 구인구직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렸다.
제목:모든 종류의 상업사진을 무료로 촬영합니다.
사진을 시작한 지는 꽤 되었지만 상업사진을 경험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원하시는 모든 사진을 무료로 찍어드릴까 합니다.
근사한 사진을 기대하시는 분들께는 먼저 양해 말씀을 드립니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저 또한 알 수가 없으니, 그런 중요한 사진들의 부탁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010-XXXX-XXXX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한 이틀을 기다리니 나에게 촬영을 의뢰한다는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문자 내용:
안녕하십니까.
거리의 사진을 찍는 노인입니다.
집이 가까워 홍대 앞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언제 날을 잡아 제 모습을 찍어주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네요.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메시지의 내용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이런 사진을 찍어서 돈을 모으기란 쉽지 않겠지마는 저 사진은 꼭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촬영 시간을 협의하고,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홍대에 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백발의 어르신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이 첫인상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지만 대충 설명해보자면,
'내가 나이가 들어서 흰머리가 삐쭉 튀어나오기 시작할 때 그를 반 정도 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정도가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할 만큼 그 어르신은 정말 멋있는 분이었다.
이미 연세는 여든이 넘으셨지만 생각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젊고 건강하신 편이었고, 어떤 대화를 나눠도 끊김이 없을 만큼 세상 만물에 해박하신 분이었다.
그분의 카리스마는 정말 대단했다. 나를 만나고 나서 하신 첫마디가 아래와 같았으니 말이다.
"상업사진을 배우고 싶은 거라면 내가 당신을 못 본 척할 테니 그저 나를 찍으시오."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냥 그의 일상을 담기만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그리고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진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40년 넘게 매일 같은 일을 반복 한 사람들 중에 저런 열정이 아직 남아있는 사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 2시간쯤 연신 셔터만 누르고 있으니,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상업사진을 시작하려는 이유가 뭔가?"
.
"솔직히 말하자면 돈을 벌고 싶어서입니다. 돈을 당장 벌어야 하는데 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요."
.
"솔직함이 마음에 드는구먼.
상업사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원하는 사진이 돈을 벌어줄 수가 없다면, 돈 버는 사진은 지금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게. 돈을 버는 사진과 자네가 찍고 싶은 사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자네에게서 사진은 그저 돈벌이 그 이상이 되지 못할 테니."
.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일로써의 사진과 사랑하는 취미로써의 사진의 경계가 허물어진 순간, 그 순간이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얼핏 보면 그분이 흔히 말하는 '꼰대'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던 그시절, 나의 인생의 키를 내 두 손에 꽉 쥐어줄 만큼 명쾌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몇 시간 동안이나 미술관 밖 벤치에서 그에게 일방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오후 5시쯤 됐을까 그가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며 나더러 따라오라 말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갔는데, 그곳에는 정말 멋있게 생긴 중년의 남성 사진가 한 분이 계셨다.
그의 머리는 장발이었고, 눈코 입은 무지 진했으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분 역시 한국 현대 사진의 역사를 온몸으로 함께한 그런 대단한 사람이었다.
두 분의 사진 철학은 무척이나 달랐지만, 서로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대했던 적은 없었다. 그저 서로의 사진을 존중하고 자신의 철학만을 따를 뿐, 요즘 인터넷에서 자주 보이는 입으로만 사진을 찍는 그런 사람들과는 정말 달랐다.
진짜 예술가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해가 질 때까지 두 분에게 진짜 사진에 대해 배웠다.
사진 촬영에 대한 테크닉이 아니고, 진짜 '사진'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인물 사진의 숭고함을 배웠고,
사진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며,
그 무엇보다도 그 날이 내가 포트레이트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해가 다 질 때까지 사진에 대한 철학적 정의와, 포트레이트 사진에 대해 이야기한 우리는 텅 비어 가는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물론 식당에서도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 사진의 역사부터, 거리 사진을 찍으며 생긴 황당한 에피소드들 까지.
정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갔다.
다음 만남이 언젠지 모르기에 아쉽기도 했지만, 미련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작은 이면지에 손글씨로 적은 이름과 번호만 적혀있는 근사한 명함을 한 장 받고 그들과 헤어졌다.
정말 강렬한 만남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나의 사진에 대하여,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생각들은 시간이 지난 지금 까지도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분들을 처음 만난 그날은 나에게 정말 의미 있는 날이다.
그 날이 처음으로 내가 나를 감싸고 있던 두터운 껍질을 깨부순 날이고,
알지 못했던, 그리고 평생 알 수도 없었던 그런 세상으로 고개를 내민 첫날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나는 요즘도 그분들이 자주 생각난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라.
다만 너무 열심히 해서는 안된다.'
그날 그가 무심코 뱉은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게 정말 진한 감동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