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마따나 무엇도 되지 않았다면 세상은 이미 몇 번이고 종말 해야 했어.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세상은 쥐 죽은 듯 평온하니, 당신을 비웃을 수밖에."
이것이 안 되면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이 아니면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지껄이는 사람이 조금 우스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안 되면 저것이 될 것이고, 저것도 되지 않으면 그것은 될 것이었다. 모든 일에는 대안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때가 여러 차례 찾아왔다. 이것이 아니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결국에는 저것으로 그것으로 알아서 빙 돌아갈 터인데, 쉬이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고작 며칠 앞의 일 정도는 훤히 꿰고 있던 나로서는 그저 눈을 꽉 감고 '차라리 무엇도 되지 않았으면'하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저것이, 저것은 도무지 싫다고 하니 그것이 왔다.
그것은 그것대로 지나치게 맑고 깨끗해서 소중히 다뤄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산산이 깨부수고 저 멀리 도망가고 싶었는데, 그것의 눈망울은 온 지구를 두어 바퀴 돌아 내 심장을 관통했다. 단순히 미안함 위에 지어진 관계가 얼마나 견고하겠느냐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한도 끝도 없이 유약해진 나로서는 당장 입안에 맴도는 단맛을 그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퍼져 나오는 쓴맛을, 매운맛을 억지로 모른 체하며, 달다고 달고도 또 달다고 되뇌는 수밖에.
그렇게 나는 항상 미안해하기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이것이 되지 않아 저것을, 저것도 되지 않아 마침내 마지막 대안으로 내게 온 그것에게 나는 미안해하지 않으면 안 됐다. 지금이 글을 적는 순간에도 마땅히 미안해야 할 누군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억지로 만남을 이어가다, 억지로 사랑을 고백받은 누구는 마침내 "당신은 그저 누군가의 대안이었을 뿐이에요. 미안해요."같은 최악의 말을 듣고야 말았다. 이것 역시 결국에는 미안함을 전하고 마는 나의 정말 어쩔 수 없는 숙명 때문이었으나, 그런 핑계 따위가 나의 미안함을 덮을 수는 없었다.
모든 저것과 그것들이 떠나버린 다음, 정말 혼자가 되어버린 다음 나는 이것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바라고 원했던 것. 거창하진 않더라도, 그저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밥을 먹고 차를 먹으면 그뿐이었던 것.
이것의 입장에서는 나 역시 무수히 많은 저것과 그것 중 하나였으므로 미안해하며 떠나보내는 게 맞는다만, 저것과 그것의 입장에 서서 보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어떻게 해야 내가 이것이 될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만약 짝을 지어 태어난다면 나와 나의 그것은 어떻게 되는 거며, 그것의 그것은 또 어떻게 되는 건지, 평생 혼자여야만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수한 질문은 허공을 몇 바퀴 돌다가 땅으로 하늘로 꺼질 뿐이었다.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만 해도 마냥 아름답던 세상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주 엉망이었다. 하지만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것은 나 역시도 얼음처럼 시린 이것이었기 때문. 분명 어릴 적 읽었던 책에서는 별과 달이 지고 나면 따스한 해가 떠오른다고 했는데, 세상에 아름다움이 지고 떠오른 것은 고독의 작란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동화는 현실에 반하는 것 같아 지난 어린 날에 회의가 몰아쳤다. 아무리 독자가 아이라고 한들, 아름다움이란 미명 위로 떠 오른 각종 기만행위는 아주 많이 역겨운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