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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Jul 05. 2024

그리움과 후회

나윤희 작가가 말하는 삶

부드럽고 탄탄한 그림체. 군더더기 없는 플롯과 감정선. 네이버 웹툰에서 활동하는 나윤희 작가의 독보적인 장점이다. 나 작가의 <고래별>, <손 안의 안단테> 연재 당시 미리보기 결제를 해가며 작품과 함께 울고 웃었다. 두 작품 모두 완결된 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사를 외울 만큼 선명 몇몇 장면이 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제 선택을 되돌리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매 순간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저 아가씨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겠지요. 백정이 되라면 되고, 작부가 되라면 되겠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보다 쉬운 일이지요. 대한독립만세.


1920년대, 독립운동가 '해수'는 독립운동의 계획을 우연히 엿들은 조선인 여급 '수아'에게 양잿물을 먹인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목소리를 잃은 수아는 해수에게 복수를 하러 오고, 해수는 분노한 수아에게 '타당하다' 말하며 양잿물을 준비한다. 스스로 양잿물을 마시기 직전, 해수는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긴다.


연재 당시, 댓글창은 사죄 대신 무심하게 죽음을 택하는 해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의 태도가 수아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이다, 죽기 싫으면서 허세를 떤다는 비난도 많았다. 하지만 작품의 완결 시점에 이르자,  해수의 태도에는 한치의 꾸밈이 없었음을  납득했다. 수아의 제지로 해수의 자살은 무마되고, 해수가 지나와야 했던 연이은 죽음이 서술된다. 그에게는 삶과 죽음도 한끝 차이의 선택지일 뿐이다. 타당하지 못한 죽음이 이미 그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갔기에.


나윤희, <고래별> 中


거대한 슬픔을 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재에 몰두해야 한다. 과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재생하며 괴로워한 끝에는, 어떤 비극에 당위성이 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는 삶을 걸고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를 한다. 죽음을 옆에 두고 사는 일은 가족과 고향을 잃은 해수가 삶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걸핏하면 과거와 미래를 잡고 불면에 빠지는 내게, 순간을 산다는 선택지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보통의 사람은 독립투사가 아니므로 앞만 보고 달려나갈 이유가 없다. 우리의 삶에는 머무를 공간이 필요하다. 박적인 해수의 삶이 잠시 머무른 순간은 수아에게 연심을 품은 때이다. 죽여야 했던 소녀를 사랑하는 아이러니 속에서도, 그는 결코 양잿물로 이어진 첫 만남을 돌이키려 하지 않는다. 사죄는 기만이기에 담지 않는다. 그저 수아가 옆에 있던 날들을 그리워할 뿐이다. 그리운 순간을 두고,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움을 버리고 나아가는 일보다 어렵고, 보다 성숙한 길이다. 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어야 현재를 온전히 산다는 아이러니가 곧 인생애(人生愛)일지도.


나윤희 작가의 차기작, <손 안의 안단테>에서는  방황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유원'이 등장한다. 자신을 둘러싼 시선에 혼란스러워 하는 유원에게 그의 멘토, 유건호 선생님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나윤희, <손 안의 안단테> 中, 유원.
마뜩찮은 일은 언젠가 지나가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다.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복잡함 속에서도 언제나 가장 단순한 것을 찾아서. 나는 후회하지 않아.
너는 언젠가, 그럴 수 있겠니?

사실 이 작품의 시작은 유원의 죽음이다. 이제야 빛을 발하는 미래와 머무를 사람들을 두고, 교통사고로 죽어버린다. 유원을 학대한 엄마는 그의 유품을 팔아 살고, 유원은 죽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러나 유원은 더이상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다. 엄마가 그를 결정하게 할 수 없기에. '가장 단순한 일을 찾아서' 유원은 피아노를 치고 연조를 사랑했다. 그의 마지막에 그리움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었을 것 같다.


해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건호의 대사에서 나윤희 작가가 말하고 싶은-살고 싶은 삶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했다. 해수와 유원은 기구한 삶을 살다 요절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력적인 인물의 죽음은 독자의 가슴을 후벼팠지만, 복해서 작품을 볼수록 선명해지는 쪽은 그들의 죽음이 아닌 치열한 삶이었다.


복잡함 속에 괴로워하고, 괴로움 속에 안주하던 근래의 나날에 번쩍, 불이 들어오는 듯했다. 잠은 작은 죽음이라 한다. 어느 날엔가 잠들면 눈을 뜰 수 없겠지.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매 순간마다 가장 단순한 일을 했다고. 막연한 삶의 끝이 아닌 매일의 밤에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려온 삶이 반드시 내게 찾아오지 않더라도, 아마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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