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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Oct 12. 2021

청렴과 선(善)의 가치에 대하여

절제의 기술 - 스벤 브링크만

  청렴이란 성품이 맑고 탐욕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성품'과 '탐욕' 등의 청렴과 관련된 단어를 탐색하다 보면 결국 '선'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르게 된다. '선'이 선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고, 악을 행하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혹자는 인간은 주위 여건에 따라 '선'을 행할 기회를 잃고 유혹에 넘어간다고 하소연한다.


이 글은 서평이라기 보단 서평을 빌린 나의 철학적 소고이다.



  덴마크의 인문학자인 스벤 브링크만은 이렇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을 '절제'라고 강조하며 그 방법으로 다섯가지 삶의 원칙을 제시하여 설명한다. 저자가 제시한 5가지 삶의 원칙-절제의 기술-은 결국 '선'이라는 최종적 목표를 위함이다. 결국 '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이기도 하지만, 의심하지 말아야 할 절대적 진리로의 귀결이기도 하다.


  성품이 맑은 사람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일에 묵묵히 매진한다. 저자가 사회학자 베버의 말을 빌려 말하는 선한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노동의 소임에 묵묵히 충실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금욕적으로 들리는 이 문구는 노동자들이 직무에 성실할수록 더 크게 주어지는 금전적 보상으로 인해 보람을 느끼게 됨으로써 자본축적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건드렸다. 신이 부여한 노동에 매진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로써 윤리적 삶의 방향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다분히 신적 존재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실존주의의 선구자 - 쇠렌 키르케고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저자의 방법론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다. 사르트르와 같은 대표적 실존주의자보다 온건한 자국의 철학자를 강조한 것으로 보아 높은 행복도의 대명사인 자국의 사상에 대한 저자의 자부심이 섞여있어 보인다. 키르케고르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실존주의의 선구자격인 인물이다. 실존주의의 대부라고 불리는 사르트르가 니체의 허무주의에 입각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명사라면, 키르케고르의 실존은 쾌락과 윤리를 극복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실존을 주창한 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먼저 저자가 유혹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키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제시한 것은, 본인이 보기에 저자의 국적과 신에 대한 믿음 유무를 넘어 그것이 무신론적 실존주의보다 독자의 접근이 편하다고 생각한 결과인 것으로 판단된다. 유혹과 쾌락을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보다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본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이 먼저 존재한 후 자신의 본질을 그려낼 수 있는 '대자적 존재'로 본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본질은 오직 행동의 총합에 따라 정의된다. 따라서 본질은 '청렴'하지만 작은 유혹 때문에 탐욕이 생겼다는 것은 변명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지하는 자신의 실존과 청렴은 결국 타인에 대한 의식의 결과이며 이는 저자가 강조하는 '선'의 행함에 있어 그 순수성이 결여된다. 사르트르도 이것을 알고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자신의 작품 내에 삽입하였다.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의 일정 부분을 신앙에 맡김으로써 선하려고 하는 인간의 부담을 줄여준다.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도 변할 수 있는 개념(단독자)'이라고 설명하며 백지상태(Tabula rasa)를 주장한 것은 사르트르와 같지만, 신 앞에 서는 단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쾌락 실존-윤리 실존의 2단계 실존을 거쳐 종교적 실존을 완성하여 '선'을 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쾌락 실존은 만족하는 순간이 또 다른 불만족의 시작이 되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쾌락을 극복해서 윤리적 존재(윤리 실존)가 된 인간은 그 무한성을 따라잡지 못하여 자기 결핍에 대한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절망한 인간은 비로소 절망 속에 비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고 신 앞에 선 단독자(종교적 실존)는 비로소 비현실적인 세상을 인정하고 자기 존재 자체, 그리고 선에 대한 의무감이 아닌 선 자체에 헌신하게 된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저자가 독자에게 특정 종교를 신앙이 깊은 한 철학자의 사상을 빌려 강요하는 것은 아님을 확신한다. 절제가 함께하는 삶이 곧 선이라는 주장은 유지하지만, 선한 삶을 위해 사회가 변화하거나 개인의 의지력을 강화하는 것은 답이 아님을 천명한다. 그저 사람들이 절제와 선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곧 자기 존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몽상가로 보일 수도 있는 북유럽 인문학자의 사상은 제약된 행동을 인내하고 어려운 경기여건에서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서구적 합리주의를 기본으로 한 변증법적 사고가 현대 한국사회에 민주주의의 발달과 함께 자리잡고 있지만, 아직까지 개인의 가치 지향의 측면에서는 유교적 색채가 남은 우리사회에 적용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청렴, 그 '선함'을 행함에 있어 문화와 역사와 무관하게 그것이 소중한 것이라는 것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절제와 유혹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현실을 견뎌내는 것만이 지금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해도, '선'의 가치를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청렴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허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가 비록 허무할지라도, 허무는 늘 현재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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