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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권 Jul 10. 2022

아프면 보이는 사람들

요즘 들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요즘 애들, 얼마나 편해졌는지 몰라. 나 때는 말이야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었어.” 조금 힘든 모습을 비추기만 해도 ‘라떼’가 등장해 내 현실을 부정하라고 일러준다. 그래, 그 말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요즘 우리들도 먹고, 자고, 입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걸, 그런 말이 내 상처를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다들 잘 벌고 잘 먹고사는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왜 나만 이렇게 되었을까. 현실을 보면서 괴로워하며 지낸 날들이 생각납니다. 뭐든지 잘할 수 있을 줄만 알았지만, 지금 당장 먹고사는 게 문제였어요. 저는, 10대에 연극을 시작해서 30대 중반인 지금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원하는 걸 한다고 그렇게 살아지지는 않는다고요. 그렇게 하고 싶은 걸 했지만 사실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만 생겨납니다. 하고 싶은 걸 하기에 생존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 급한 불이니까요. 그거 아세요. 불안정에서 오는 안락함이 익숙해지는 게 제일 무서워요.”     

     

회사에서 만난 한 청년은 말했다. 30대 중반에 간신히 계약직 자리를 얻어 처음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는 그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어오던 배우가 되었지만 결국 배우의 길을 포기하기까지의 그 고뇌를 누가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배우의 세계가 보이는 것만큼 그리 아름답지도 또 많은 기회도 없다고 한다. 매일이 생존의 길이라고. 그런 치열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오는데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는 청년이 많다.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라는 윗세대들의 말을 믿고 앞만 보며 책상에 앉아 있던 그들은 어느 순간 사회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로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면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을 줄만 알았다. 모두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저 그렇게 믿으며 살아온 것뿐인데, 그 말을 믿고 따르면 행복해질 줄로만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닐 것 같지만 요즘 의식주 문제를 해결을 하며 힘겨워하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느 시대인데 그러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너무 많은 젊은 층의 사람들이 사회 진출 시작부터 거주할 집 문제부터 때로는 식사 해결을 고민해야 하는 그런 일들이 많아졌다. 전국에 주택 보급률이 늘었다고 하지만, 실제 미래세대를 위한 배려는 그다지 보이지가 않는다.      


자신이 노력하는 것만큼의 대가를 기대하기 힘든 사회생활을 해야만 하는 젊은 층의 고단함은 시대와 맞지 않게 너무 일찍 시작된 듯하다. 뉴스에서는 금수저가 다이아몬드 수저로 갈아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1세기형 빈익빈 부익부라고 해야 할까. “왜 나는 저들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지?” 그렇게 속으로 되뇐다. 대부분의 청년은 자신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사회가 내어주는 작은 평수의 좁은 골목에서 내일에 대한 불안함을 이겨내고 있다.  


paris_shin


고시원 입구를 자세히 보면 학생보단 말끔한 차림의 직장인이 더 많아 보인다. 신기하게 봐야 할까. 신림동에 공부하라고 처음 시작한 작은 공간이 이제는 집 없는 사람들의 공간이 되었다. 캐나다에서 온 프로게이머 기욤 페트리는 처음 한국에 와서 몇 년 동안은 고시원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처럼. 외국인뿐만이 아니다. 세상을 향한 힘찬 도전을 하는 청년들도 고시원의 단골인 세상 아닌가.    

  

그렇게 학교 졸업 후 어렵게 취업에 성공하고 시작되는 현실 타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퇴근길 화려한 아파트를 지나 골목의 끝에 해가 잘 들지 않는 4층 옥탑방 같은 청년의 아픔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게 힘든 청년의 모습은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단순히 힘내라고만 말하기에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오늘도 계속된다.     

    

사실 윗세대들의 “나 때도 다 그랬어”라고 말할 때 우리들은 더 큰 상처를 입는다는 걸 알고는 있는 걸까. 왜 그런 아픔을 느껴야 한다고, 그래야만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걸까. 활짝 핀 장미가 되고 싶지, 줄기에 가시가 되고 싶지 않은 게 우리들이다. 그게 아픔이 되고 삶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건 줄도 모르면서. 우리들이 겪는 큰 어려움은, 내가 처해진 상황에 대해서 비관할 때 자주 발생하는 것 같다.   

       

나는 아직 취업 준비생인데 공공기관 취업에 성공한 친구가 만나자고 하면 처음에는 반갑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를 멀리하게 된다. 생존을 위해 아르바이트해봐야 최저시급을 받지만 친구가 입사한 회사의 초봉은 5천만 원이 넘어가는 데, 쉽게 마음을 다 잡을 비교 안 할 수 없는 멘탈 강자가 그 얼마나 있겠는가. 비교하지 말고,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우리들이다.     


그렇게 살아간다. 사실 예전에 나도 사회 진출이라는 단어가 나를 쉽게 받아주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버텨온 시간이 많다. 현실 타파를 경험하면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정작 쓰러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투자’였다. 돈을 들이는 투자 말고, 내 젊음을 투자한다고 생각하며 각종 경험을 해나갔다. 아르바이트하며 최소 기준을 정한 일상을 살면서 틈틈이 독서 여행도 하며 생각의 폼을 늘려나가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다 살아지게 되는 게 아닐까. 지금은 아닐 것만 같지만 자신의 삶은 조금씩 변하고, 때로는 좋은 기회가 찾아오게 되더라. 사회 초년생 시절 힘들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인생에 3번의 기회는 찾아온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그저 믿었다. 어디에서도 증명하지 못한 그 말이라도 믿어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지만, 그래도 그랬다. 그거라도 없었으면 정말 무너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파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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