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많이 맞아본 사람이 잘 때리게 되기도..?
수련생활을 하면서 좋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놀랍다. 명백한 실력 차에도 숙련자와 최선을 다해 대련하는 초보자. 꾸준한 연습 끝에 시합장에서 멋진 한판을 따내는 아마추어 선수. 제자들과 칼을 맞댈 때 맞을 건 맞고 이끌어줄 건 이끌어주시는 6~7단 고단자 사범님들. 도장이나 시합장에서 만났던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이들이 나와 직접 관계 맺는 사람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멀리서 바라만 봐도 전해지는 에너지가 있어서다. 배려심 깊은 숙련자에게는 상대를 관찰하며 알맞은 말과 행동을 고르는 섬세함이, 마음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부족함에 주눅 들지 않고 몸을 던지는 용기가 있었다.
“사람은 때로 튼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라 했던가. 책 <용의자 X의 헌신> 속 대사처럼, 그들의 견실함을 보는 것만으로도 꾸준히 노력을 관철하는 행위의 중요성, 자신의 실력을 몸으로 한껏 표현하는 당당함을 배운다.
반면 이런 사람들도 있다. 타격부위(머리-손목-허리-찌름)가 아닌 몸의 다른 부위(겨드랑이나 팔꿈치)를 쳐서 상대를 다치게 한다. 쳐놓고 사과 한 마디 없다니. 상대가 손목 공격기회를 노렸는데 내가 노련하게 피해서 다른 데 맞은 건가.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 치자.
“나 아직 초보자인데 상대가 나한테 ‘찌름 기술은 이렇게 하는 거야"하면서 (죽도로) 마구 찔렀어.”
“공격연습을 하는데 저단자인 나를 일방적으로 때리는 거야. ‘너는 이런 거 할 줄 모르지?’라면서"
매너 없는 상대와 대련한 친구들의 모습을 직접 보기도 하고 일어났던 상황을 전해 듣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화가 솟구친다. 사연의 무례한 주인공이 눈앞에라도 있으면 그날은 나쁜 놈 응징의 날이다(내가 혼자 정했다). 커지는 기합, 죽도에 실린 묵직한 힘. 이렇게 나는 검도수련의 목표 중 하나인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화가 나는걸. 약한 상대에게 실력을 과시하다니. 그게 무슨 검도인가요. 심지어 검도(劍道)의 한자 '도'는 '칼 도(刀)'가 아닌 '길 도(道)'인데요. 칼을 도구로 마음을 닦는 수련일 텐데요.
다른 검도 수련자들에게 물어보니 각자의 해답이 있었다. “기분이 너무 나쁠 때는 손을 들어 대련을 멈추고 상대에게 다가가요. 오늘은 몸이 안 좋다면서 잠시 쉬겠다고 말하기도 해요.” “그냥 머리치기 기본만 해요" “그런 상대와는 대련 자체를 피해요" 피해자 모임처럼 각자의 속앓이를 터놓는 데 그치는 경우도 있다.
맞고 또 맞다 보면 또한 때릴 수 있지 아니한가
10년 넘게 검도 수련자 생활을 해온 사람으로서, 내게는 무례한 사람을 대할 때 초보자로서는 선택할 수 없는 옵션이 있다. 상대를 실력으로 제압하는 것. 무찌르고 싶은 사람과의 실력 차가 클 때는 한동안 대련을 피했다. 상대를 함부로 치는 사람의 경우 자세가 엉망인 경우가 많은데, 그런 사람과 대련하면 나도 자세가 흐트러져 다 함께 엉망이 되고 마니까.
자세가 안정됐다 싶을 때부터는 껄끄러운 상대를 피하지 않고 꾸준히 대련했다. 보통 나보다 빠르고 힘센 경우가 많아 계속 맞았다. 정말 많이 맞았다. 자꾸 맞다 보니 어쩌다 맞는지(내가 쫄아서 멈칫하는 순간에 상대가 때림)를 알게 되고, 어디를 더 자주 맞는지 알게 되고(손목을 자주 노리시는 구나), 나중에는 상대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순간(손목공격을 받아 머리를 쳐야겠다)이 생겼다.
정말 많이 맞은 다음부터는 어느 순간부터 상대와 대등해지기도 했다. 혹은 매번 잘하지는 않더라도 상대와 대등해지는 순간이 생긴다. 수련자들끼리 종종 하는 점수내기 시합에서 무찌르고 싶었던 상대를 나흘 연속 이겨보았다. 약한 상대만 골라 상대하며 자기 힘을 과시하던, 나보다 힘세고 빠른 나이 많은 상대(검도를 나보다 늦게 시작하심)에게 명확한 한방을 때리는 순간도 있었다.
답답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냈다는 것 자체는 무척 고무적이지만. 근데 이거 오래 걸린다. 오래 걸려도 너무 오래 걸린다. 자세를 가다듬는 기본기 연습, 필요한 응용동작을 몸에 익히기, 상대의 빈틈을 감지하고 힘을 역이용하기 등등. 성장을 위해 필요했던 그 구체적 움직임들의 틀이 잡히고 성과를 보이기까지. 한두 해가 아니라, 정말 꽤 많이 걸렸다.
상대를 실력으로 제압해버리면 긴 말이 필요 없다. 누군가를 제압하고 싶은 마음은 실력을 위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고, 목표를 이뤘을 때의 성취감도 꽤 크다. 수고로움의 끝에 놓인 이 마음을 경험해버리면 검도에 대한 내 애정도 한 뼘 자란다.
그러니까 이 성취감은 무모하리만치 오래 한 우물을 파버린, 느리지만 단단하게 구축한 내 성장의 결과다. 하지만 초보였을 때 무찌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면? 덤빌 엄두는 무슨. 마음과 몸이 못 내 찌그러들었겠지 싶다. 왜 초보한테는 무례한 상황을 멈추게 할 만한 방법이 없을까. 내 실력을 높이는 건 어찌어찌해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