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짓는 일도 잊고서
“수련하다 보면 잘 되는 날도 안 되는 날도 있죠. 서핑과 비슷해요. 좋은 파도든 나쁜 파도든 그 순간에 맞는 파도를 타는 거죠. 나중에는 바다가 잔잔해지는 때가 와요.”
어느 토요일. 수련 시간이 끝나고 관원들이 모여 앉아 음료수를 마실 때 5단 M사범님이 다가와 해준 말이다. 다독이려 했으려나. 사범님과 대련하면서 유난히 헉헉댔던 날. 몸도 마음도 가라앉은 내 상태를 보여서 그렇게 말해준 거겠지. 언제나 잘 할 수는 없다고, 매순간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고. 상대의 그 말에 출렁이던 마음 속 파도가 잔잔해져갔다. 그래. 지금의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을 해내보자. 후배인 나는 이런 식으로 선배들의 좋은 말을 넙죽 받아들며 자라왔다.
선배들 앞에서 말해본 적은 없지만, 검도 안 하는 친구들에게 선배들에 대해 말할 때 가끔 ‘사형'이라 부른다. 무협드라마 팬에게는 익숙한 표현 아닐런지. 같은 사부 아래에서 배우는 사람을 두고 ‘사형' 혹은 ‘사매’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내게는 사매가 거의 없고 사형들은 퍽 많다. 보고 자란 게 사형들이어서인지 머리를 짧게 잘랐다. 사형들이나 나나 손에 굳은 살이 배길 만큼 죽도를 휘둘러왔다. 도장에 얼마 없는 여성이자 본인들보다 어린 사람이 열심히 하는 모습. 거기에 사형들의 마음이 열렸던가. 비인기 종목을 좋아하는 드문 사람. 그 드문 사람들 안에서도 더더욱 드문 여자. 그 안에서조차 더더욱 드문 후배라는 위치. 그런 상태로 나는 어느샌가 그들 틈에 섞여 검도 이야기를 하거나 승단과 시합 등 여러 이벤트를 겪어나갔다. 4단이 된 후부터는 사형들에게 공격을 성공시키는 순간도 종종 생겼다. 쌓인 실력만큼 서로가 나눌 수 있는 대련의 몰입감도 그만큼 커져서는, 사형들 사이에서 더 크게 웃고 말수가 늘었다.
반면 사형들 앞에서 입을 다물거나 주춤거리는 순간도 있다. “여자가 그만큼 하면 됐지"라거나 “다른 도장의 여자 사범이 너보다 예쁘더라" 같은 말을 들을 때. 분명 흉이나 욕이 아닌데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린다. 그 말들을 어색하게 웃고 넘기지만 뒤돌아서서는 마음 속 물음표가 점점 커져갔다. 성별에 따라 ‘그만큼'의 크기가 정해져 있나. 왜 실력에 대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순간 외모 이야기를 듣게 될까. 여차 하는 순간 성별로 연결되는 말들을 들으며 깨달았다. 내 성별은, 그러니까 아무리 사형들과 어울려도 남동생이 아님을. 한계 짓는 말들을 간신히 뒤로 한채 노력한 만큼 성장하고, 때로는 왠만한 남자 선배들을 실력으로 제압하기도 하는. 그런 모습 자체로 엄연히 존재하는 게 나의 성별임을.
나는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그만큼 하면 됐다’고 말하지 않는 사형들 곁으로 간다. 그들이 내게 알려준 수련 지식을 머리로 받아들이고 몸으로 표현해본다. 수련이 잘 되는 날은 몸이 붕붕 하늘을 나는 것 같다. 컨디션이 영 시원치 않은 날에는 몸이 땅으로 푹 꺼질 듯하다. 그래도 있는 힘껏 땀을 흘리며 내 몸이 하나하나 뭔가를 이뤄간다. 그 과정에서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는 일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함께 수련하는 동료. 같은 취미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순간들이 한해한해 쌓여갔다. 그렇게 나는 우렁차게 내지르는 기합을 쑥쓰러워하지 않는, 선명한 두 줄이 드러난 전완근을 드러내며 죽도를 휘두르는 생활체육인으로 거듭나왔다.
감사한 선배들을 한분한분 기억한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사회초년생 시절까지 나를 챙겨주셨던 G선배님. 말수는 적지만 수련 관련해서는 항상 섬세하게 이것저것 알려주어서, 초단부터 3단까지의 내 검도실력은 거의 그분에게 빚졌다. 동작이 어설플 때면 빨간펜 선생님처럼 “그게 아니야. 그 동작은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등장하던 사람. 나를 포함한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인 도장 철부지들에게 언제나 아이스크림과 떡볶이를 사주셔서 ‘아버지'란 별명으로 불렸다. 실력에서도 사람을 대하는 면에서도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던 최초의 선배님 아니었을지.
또 다른 사람은 J선배. 다른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갈 때 혼자 왼쪽으로 가는 마이페이스의 소유자다. 그런 점이 철없는 둘째오빠 같지만 시합장에서는 흔들림 없는 멘탈로 점수를 훅훅 뽑아내는 저력을 보여준다. 마음 가는대로만 행동할 것 같지만 의외의 면도 있다. 내 입장에서 싫은 부분을 말하면 멈춰줄 줄도 안다. 솔직함이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심이 된다 해야 할까. J선배와 단짝인 P선배도 나와 오래 알아왔다. 시합장에서 만날 때면 서로 응원을 주고받으면서 시합 내용을 확인하며 서로의 성장 정도를 가늠한 적도 있다. 시합 나갈 때는 잔뜩 긴장하지만 도장 안에서는 우렁찬 기합소리를 자랑하는 S사범님. 몇년 주기로 도장에 종종 등장하는 섬세한 피드백의 대가 M사범님. 이 두 5단 선배들 덕에 4단 이후의 수련에서도 새롭게 배워야 할(혹은 예전에 배웠지만 잊었던) 내용들이 손이 잡히는 형태로 뚜렷이 와닿았다.
사형들의 곁에서 수련의 일상이 흐른다. 나는 이들과 함께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까. 항상 그들에게 배우기만 하는 사람인가 싶은데, 종종 저단자들을 가르치는 순간이 늘어나는 걸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선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내 실력으로 당당해지는 순간이 조금씩 늘어날지도. 미래의 누군가에게 든든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영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