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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re Feb 16. 2024

사정이 여의치 않은 분을 위한
돈까스

퇴근길의 내 마음 충전소 서교동 '명동왕돈까스'

 서울에 올라와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곳은 홍대 앞, 서교동 원룸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한참 동안 서교동에서 학교를 다녔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한 동안 서교동에 살았다. 그만큼 서교동 부근에는 지금까지도 이래저래 잔정이 남아있는 장소들이 많이 있는데, 당시에는 마음의 고향 같은 주변 식당들도 많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오래된 <명동왕돈까스>이다.


 돈까스라는 음식이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남자애들의 1순위 외식메뉴였고, 나 역시 가지런히 잘라져 나오는 일식 돈까스를 처음 먹어 본 이후로는 항상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 일식 돈까스집이 바로 서교동 집 앞에도 하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맛이 엄청 대단했던 것도 아니고, 인테리어가 멋지다거나, 이 집만의 특별한 메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명동왕돈까스>라는 어디에나 있을법한 흔한 상호명에 어울리는 딱 내가 아는 맛의 돈까스와 내가 아는 메뉴들이 전부인 그런 집이었다. 다만, 이 집 문 앞에 걸려있는 커다란 현수막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이었다.


"돈까스를 드시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은 분은 들어오십시오. 대접하겠습니다"  


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문구가 아닐 수 없었다. 나 역시 몇 번인가 가게 앞을 지나치다가 저 문구를 보고, 훈훈함 반, 호기심 반으로 처음 가게에 들어섰던 것 같다. 메뉴는 일식 돈까스 집이었지만, 내부는 지극히 한국적인 느낌이었다. 나무로 이루어진 오래된 술집 같은 인테리어는 전혀 일본 스럽지 않았고, 매장에서는 항상 잔잔한 CBS FM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메뉴판 이미지도 모두 어디서 본 듯한 흐린 사진들이었고, 깍두기와 고추를 넉넉히 주시는 인심까지.. 트렌디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돈까스집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혼자 들어와서 밥을 먹기에는 더없이 편안하고 부담 없는 식당이었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친 이후, 난 그 집의 단골이 되었다. 길 하나만 건너면 세상 트렌디한 홍대 앞의 맛집들이 즐비했지만,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 지친 퇴근길에 밥 하기 귀찮을 때,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싫어 조용한 장소를 찾을 때면, 어김없이 이 집을 찾아 CBS FM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돈까스를 먹곤 했다. 내 기분 탓이었는지, 유난히 그 식당은 나처럼 혼자 와서 돈까스를 먹는 손님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사장님께서 무료로 돈까스를 대접하시는 모습도 두어 번 정도 직접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명동왕돈까스>는 나 혼자 찾는 비밀 식당 같은 곳이 되어갔고, 특히나 힘들고 지칠 때 이 집을 찾을 때면, 문을 열고 CBS FM 음악이 들려올 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하지만, 매번 시간이 지나서야 뒤늦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이, 정작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이 집의 소중함을 못 느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엄청난 맛집도 아니었고, 그냥 집 앞에 있어서 편하게 갈 수 있는 식당이라 생각했지, 이 집에서 느꼈던 위로의 순간들은 그다지 마음에 담아두진 않았다. 이 집이 내게 주었던 소중한 마음의 위로들은 오히려 서교동을 떠난 이후에 더 많이 생각나곤 했다. 유난히 사람들로 지친 하루,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들을 안고 집으로 향하던 저녁, 문득 그 집에 가서 혼자 잔잔한 CBS 라디오를 들으면서 돈까스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우연히 홍대 앞을 지날 때면 그 집이 아직 잘 있는지 한 번씩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지난여름, 홍대에서 업무 미팅을 마치고 나오자, 사무실 복귀 시간이 애매해져서, 현장에서 직퇴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마침 혼자 시간이 난 김에 정말 오랜만에 그 집을 찾아 돈까스를 먹고 집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화려하고 멋진 다른 식당들을 지나쳐 골목에 들어서니, 익숙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법처럼 여전히 CBS FM 방송이 흐르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예전보다 조금 낡은 모습에 손님이 많지 않은 것 같아, 문득 장사가 잘 되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엄청 유명한 맛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가게 앞 현수막에 담긴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이 나와 같은 손님들에게 알게 모르게 전해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제일 비싼 모듬까스를 시켜서 맛있게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서자, 현수막의 '사정의 여의치 않은 분'이라는 문구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내가 직접 공짜로 돈까스를 대접받았던 기억은 없지만, 나 역시 '마음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많은 순간에 따뜻한 음식으로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을 떠올리면 편안한 저녁 식사 시간이 그려지는 이 집이 오래오래 사랑받는 식당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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