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생각나는 한국음식 1위
예전처럼 막 꿈에 나온다던가, 안 가본 집은 꼭 가봐야 한다던가, 생각날 때면 아무리 먼 길을 찾아가서라도 먹어야 된다던가 하지는 않지만, 나는 여전히 '평양냉면'을 좋아한다. 마침 회사 근처에 유명 맛집 중에 하나인 '진미 평양냉면' 있어서, 심심치 않게 사람들과 냉면을 먹으러 다니는 걸 좋아한다. 사실상 '서울'냉면인 밍밍하고 슴슴한 '평양냉면'. 지금은 전문점들도 더 많아지고, 전국적으로 예전보다 더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예전에는 대표적인 평양냉면 맛집들은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였고,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집들 뿐이었다. 따라서 나 역시 평양냉면을 처음 먹어보고, 다른 맛집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전까지 내가 아는 냉면이란 음식은 분식집에서 파는 음식이거나, 고깃집에서 후식으로 먹는 음식일 뿐이었고,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도 아니었다.
첫 회사 막내 시절, '평양냉면이 요즘 젊은 친구들의 핫한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고, 유명한 집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내용이 화두로 올라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 팀은 아직 안 먹어본 사람들이 많았고, 당시 가장 맛집들을 잘 알고 있던 내 사수는 '광고회사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개탄해 마지않았다. 그래서 그 사수의 영도 하에 날을 잡아 다 같이 평양냉면을 한 번 먹으러 가기로 했다. 목표는 '우래옥'. 솔직히 당시 내 생각으로는 굳이 냉면을 먹으러 단체로 택시를 타고 식당을 찾아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택시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자 생각보다 거대한 식당이 모습을 드러냈고, 주차장에 가득 찬 고급 승용차들을 보니, '아 내가 생각한 냉면집이랑은 아예 개념이 다른 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 복잡한 주차장과 로비를 거쳐, 약간의 대기시간까지 감수한 뒤에 자리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고색창연한 식당은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고,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딱 봐도 애들이나 찾아올 거 같아 보이지 않는 식당의 풍경은 아직 맛보지 못 한 '평양냉면'의 맛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아... 얼마나 맛있을까?'
나를 두 번째로 놀라게 했던 거는 바로 메뉴판에 적힌 냉면 가격이었다. 그 인기에 비례해 매년 가격이 오르면서, 천장을 뚫고 올라간 지금의 평양냉면 가격에 비하면, 당시에는 그래도 많이 저렴한? 편이었지만, 당시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냉면' 가격이었다. 무슨 냉면이 만원 가까이한단 말인가? 냉면을 금으로 치장한 것도 아니고, 그래봤자 냉면일 뿐일 텐데 어떻게 이 돈을 주고 먹는단 말인가? 비싸고 오래되어 보이는 식당이라 생각했더니 냉면도 너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팔고 있는 거 아닐까?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보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회사에서 선배들을 따라온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계산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아무리 내 돈 주고 사 먹는 게 아닐지라도, 이 정도 가격이면 나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맛'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용납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얼마나 맛있는지 한 번 두고 보자!'
그렇게 잔뜩 벼르고 있던 차에 음식이 나왔고, 첫 술을 떠서 냉면 육수를 맛보고 나서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런 맛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물론 첫 술에 엄청 맛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거는 아니지만, 30여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처음 맛보는 음식임은 분명했다. 이게 냉면이라고? 생전 처음 맛보는 음식 맛에 열심히 냉면을 먹다 보니 점점 맛있다고 느끼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좀 화가 났다. 분명 용납할 수 없는 냉면 가격이었는데, 이렇게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음식이 나온다면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이제 이 음식이 먹고 싶어지면 나는 꼼짝없이 이 돈을 내고 냉면을 사 먹어야 하지 않는가... 뭔가 좀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냉면과의 싸움에 진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평양냉면'을 맛있게 먹고 나서 난 그대로 평냉 매니아가 되어 버렸다. 그날 같이 처음 먹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분명 호불호가 갈렸던 걸 보면, 평양냉면은 역시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던 거 같다. 하지만 나는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한 동안 맛있는 평양냉면 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로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언제 먹어도 참 맛있는 음식이었고, 유명한 노포들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들도 너무 좋았다. 그래도 역시 '을밀대'가 최고지~, '평양면옥'이 더 낫지 않아?, 아직도 '필동면옥' 안 가봤어? 강남에 OO면옥 출신 주방장이 새로운 냉면가게를 차렸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평냉을 좋아하는 광고회사 선배들과 여러 집을 다녔더랬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집은 지금은 사라진 '을지면옥'이다. 복잡한 공구 상가들을 지나, 시장 골목길로 찾아 들어가는 그 길과 가게의 분위기까지 좋아했던 집이라, 아마 다른 곳에서 재오픈한다고 해도 그때 그 정취를 다시 느껴보긴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첫 경험에 바로 평양냉면 애호가가 되어버린 나는, 이후에 한 가지 딜레마가 생겼는데, 바로 '한국에 돌아가면 뭘 제일 먼저 먹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었다. 음식을 많이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이나 출장을 좀 길게 간다거나, 현지 음식들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을 때, 의례 한국에 돌아가면 뭘 먹을지 생각해 보곤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하듯 대체로 매콤하고 칼칼한 음식들이 생각나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처음 평양냉면을 먹었던 날 느꼈던 '그 어디에서도 못 먹어본 맛'에 대한 기억이었다. 외국의 어느 낯선 거리들을 헤매다가 문득 평양냉면의 그 슴슴하고, 밍밍한 맛이 떠오를 때면 도무지 대체할 수 있는 음식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 맛을 무엇으로 대체한단 말인가? 그렇게 문득 해외에서 평양냉면의 맛이 떠오르는 경우에는 며칠 동안 그리워만 하다가, 귀국하는 길로 냉면을 먹으러 가곤 했다. 마침 인천공항에 '봉피양'이 있었어서 입국하는 길로 캐리어를 들고 찾아가 냉면을 한 그릇 먹고 가는 게 루틴이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K 컬처의 위용으로 외국에 나가서도 그럴듯한 한식을 맛볼 수 있는 경험들이 많아지면서, 여행 중 한식에 대한 그리움이 예전만큼 간절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지면 평양냉면 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한국 가면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은 계속 평양냉면이다. 얼마 전에 공항을 찾았더니 인천공항에 있던 그 '봉피양'도 인근 파라다이스시티로 옮겨가서 발품을 더 팔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