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맛이 된 냉삼의 기억
여름의 끝자락에 문화가 있는 수요일을 맞이했다. 우리는 새로운 대표님이 오시고 난 후부터 문화가 있는 수요일을 챙겨 보내려고 노력 중이었다. 후배들이 고른 행사는 세종문화회관 전시회 <야수파 걸작전>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광화문은 여전히 복잡하고, 정신없고 시끄러웠다. 그래도 강북에 오랜만에 진출한 기념으로 전시회 관람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위해 서촌을 찾았다.
서촌의 먹자골목을 한 바퀴 둘러보고 우리가 선택한 곳은 레트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냉동삼겹살집이었다. 메뉴부터 인테리어, 배경음악까지 어느 하나 레트로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연스레 벽에 붙어 있는 오래된 광고들이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8090 가요들은 세대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맛을 보게 된 냉삼, 아니 내 기억에서는 '로스구이'였던 그 음식은 어린 시절 추억들을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면 지체 없이 '로스구이'라는 답이 나왔었다. 냉동 삼겹살을 얇게 썰어내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구워 먹던 '로스구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고, 고기만 계속 구워준다면 상추쌈과 함께 밥을 2~3 공기는 해치웠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 식구 4명이서 고기를 구워 먹으려면, 정육점에서 삼겹살 두 근을 사와야 했으니, 지금 식당 기준으로는 7~8인분에 해당하는 고기를 한 끼에 먹어치웠던 것이다.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건 물론 나였다. 어린 시절부터 입맛이 까다롭고 안 먹는 음식이 많았던 나는 유난히 로스구이를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왜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항상 냉동삼겹살 구이를 '로스구이'라고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전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모든 고기를 구워 먹는 음식이, 다 '로스구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로스구이'는 딱 냉삼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사람들은 냉동 삼겹살 대신 생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다양한 숙성 방식과 고기 굽는 방식의 등장으로 삼겹살 구이는 더 화려해지고 맛있어졌다. 와인삼겹살, 떡 삼겹살, 벌집 삼겹살, 3초 삼겹살 등등 한 입에 감동을 준 맛있는 삼겹살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어린 시절 우리 네 식구가 식탁에 앉아 구워 먹던 '로스구이'의 느낌을 다시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일이었다. 얇디얇은 대패 삼겹살이 아닌 '로스구이'를 먹으며, 옛날 노래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위해 떠나는 사람과 작별인사를 하는 경험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특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