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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n 14. 2019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

아녜스 바르다

영화를 찾아서 혹은 까다롭게 골라서 보긴 하나 겨우 인디영화 상영관을 찾아 가는 정도라

‘아녜스 바르다’는 처음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신문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 

그러니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잊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새롭게 기억되는 일이기도 하다.  

기억의 한시성은 죽음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과정 속에서 그러한데

굳이 죽음의 한 단면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잊힘을 기억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 지닌 말할 수 없는 고요함과 그 적막 속에 어리는 슬픔 탓이리. 

어쩌면 죽음은 사람의 자리 중 가장 품위 있는 자리일 수도 있다.  

살기위해 저지르게 되는 숱한 일들에서 벗어나는 일이니까, 

거기 혹시 평생을 찾아다니던 완벽한 자유가 있지 않을까, 

귀엽고 사랑스러운 바르다 할머니,

새로운 세상 속에서 지금 미소 짓고 계시지요?


아녜스 바르다를 검색하면 마치 그녀의 호라도 되는 것처럼 누벨바그라는 단어가 나온다. 

새로운 파도라는 뜻의 이렇게 분절된 단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영화는 ‘다름’인데 그 다름 속에서 획을 짓는 구별이 싫음이고 

어떤 사안들을 그 구별로 해석하고 몰아가는 것이 싫어서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어리숙한 성향 탓이기도 하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을 로드무비라는 단순한 어휘로 구별 짓는 것 역시 못마땅하다.

로드무비를 폄훼해서가 아니라 로드 무비 속에 배어있는 평범함이 싫어서다. 


이 영화는 독특하다. 

영화로 봐도 경이롭고 다큐멘터리 같지만 그 보다도 훨씬 특이하다.

그러니 책으로 친다면 적어도 내겐 아주 우수한 양서 일곱 권 이상의 분량이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한다. 

저절로 그녀, 감독에 대한 경외감이 생기게 만드는 영화여서 

헤이리에 가서 그녀의 마지막 작품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도 보았다. 

그 영화 속의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특별히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를 꼭 보고 싶었다. 

다운로드 할 곳이 없어서 아들래미한테 이야기를 해서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봤다.

그러니 일주일에 걸쳐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세 편을 본 것이다.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녀의 ‘럭비공 같은 성향’이었다. 

그녀는 모든 영화를 만들 때 특별한 구조를 혹은 계획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주 좋게 여기는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 럭비공 성향이 럭비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호기심이 

나도 좀 그런가~~~ 싶기도 해서 더욱,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의 시작은 사전이다.

카메라가 사전속의 G를 주목하다가 gleaner 이삭 줍는 사람들.... 줍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마치 영화가 앞장서서 아녜스 바르다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것 처럼도 보인다.    

버려진 감자를 줍는 사람들을 찍다가,

 (세상에 45만 톤을 생산해서 20여만 톤이 버려진다고 한다) 하트모양의 감자를 줍는다. 

그리고 그 감자가 파랗게 변하고 쭈그러들고 바짝 말라가는데 그곳에서 싹이 나온다. 

마치 그녀의 늙은 손 같은 모습의 감자.......클로즈업된 감자의 아름다움 = 생명성이라니

늙고 시들은 것을 적나라하게 조망해내는 그 생에 대한 웅변과 찬가라니,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은 

바르다와 무려 55살 나이차가 나는 그래비티 작가인 JR과  “위대한 도약‘인 ’함께‘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바르다가 원한 것은 ’즉흥적인 모험‘이었다. 

JR의 사진을 바로 찍을 수 있고 바로 커다랗게 찍어낼 수 있는 트럭을 타고 떠난다.  

아름다운 길과 평범한 동네 다 저물어가는 탄광촌에서 그들은 서로 사진을 찍고 찍어주며 

JR은 커다랗게 인쇄된 사진을 벽에 붙인다. 

오래된 벽 짓다만 폐허가 되어가는 벽 창고건물 등에 붙인 사진 작품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우며 감동에 젖게 한다.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일순간 바뀌게 하고

익숙했던 사람을 새로운 존재로 각인시킨다. 

주변에 잘 보이지도 않던 사람들의  생을 무대 위에 등장시켜 주인공을 만들며 

불편해서 뿔을 잘라버리는 염소 키우는 사람과 그냥 뿔은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며 뿔 있는 염소를 키우는 사람들을 만나 잘생긴 뿔이 있는 염소사진이 작품이 되기도 한다. .  


사진을 찍기 전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번득이는 지성, 통찰, 성찰이 이어지고 뿐 아니라 그 저변을 흐르는  따뜻한 정과 부드러움은 달콤한 슈크림처럼 스며든다. 

제이알을 쟝 뤽 고다르에게 소개 시켜 주겠다며 고다르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고다르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고맙지 않지만, 그럼에도 고맙다는 답을 적는 아녜스, . 그래도 일렁이는 눈빛....그 때 상처 입은 아녜스를 위해 절대 안경을 벗지 않는, 친할머니에게도 보여 주지 않던  JR이 선글라스를 벗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노르망디 바닷가에 버려진 벙커ㅡ독일군이 해안 방어를 위해 설치한 토치카다. 바닷가 그 장면은 이미 사막 같은 황폐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벙커에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그를 기억하기 위해 생가를 찾아가고

어쩌면 그보다 저 사진을  기억할지 모른다고 아녜스가 말하는 사진작가의 사진이 붙여진다.   마치 요람속의 아이처럼 보인다는 사진이 벙커에서 살아난다. 

그러나 다음날 밀물에 의해 이미 씻겨 버려 흔적도 없다. 

”사진이 사라지는 것은 익숙한데 그래도 바다가 너무 빠르다“는 JR의 말에

 아녜스는 ”바다는 항시 옳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래 폭풍 속에서 사진은 사라졌고 우리도 사라지겠지만....영화는 끝나지 않고....“

바르다가 말한다. 

모래 폭풍이 불어오는 마지막 장면이 참으로 아름다운데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마지막 장면이 되기도 한다.  


    

영화 후반부에 아녜스의 늙고 작은 발과 눈을 JR이 찍는다, 

그리고 커다란 화물차에 발가락과 주름진 눈을 붙인다. 

"당신의 눈과 발이 이야기를 하네요. 당신이 가지 못했던 곳을 갈 거예요."   

’기생충‘을 본 독자들에게 제발 스포일러를 삼가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영화가 겨우 줄거리에 의지했다는 자기 폄훼의 이야기일 것 같기도 하다.

아녜스의 영화는  전체 줄거리를 얼마든지 알고 가서 봐도 

오히려 알수록 체급 높은 미를 깨닫게 되는 영화이다.  

아주 맛진 양념처럼 (나는 베트남에 살던 지인으로부터 실제 키운 후추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 생 후추를 갈아 넣으면 모든 고기들이 고급진 향기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트럭 안에서 88살 할머니와 33살 젊은이의 가벼운 춤과 노래도 들을 수 있다.     

제대로 된 리뷰를 쓰려면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다뤄야 한다.

그렇다면 날을 새야 할것이고 누가 또 그런 기다란 글을 읽어주겠나.

그래서 이만, 

아녜스 바르다 만세! 하고 싶으나  돌아가셨으니 

아녜스 바르다 경께 경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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