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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Feb 19. 2020

설국열차가 시작되었는가

신ㅡ인문학으로 읽는

  책한민국이라는 유튜브를 구독하고 있어요. 거의 매일 한 권 이상씩 소개가 올라오니 궁금하죠. 이 사람은 직업이 뭘까, 하루 내내 책만 있는가. 이 책은 다 사서 읽는가ㅡ사서 읽는 것 같기도 해요. 왜냐면 책 사이사이에 포스트잇이 다 붙어있으니까, 요약한 내용을 보면 자세히, 잘, 읽는 것 같기도 하구요. 읽는 책의 방향도 하도 다양해서 나처럼 책을 편식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용합니다. 가령 어젯밤 걸을 때ㅡ사실은 걷기 싫은데도 들을만한 강의가 있으면 헤드폰을 끼고 걸으러 나갈 힘이 생기곤 하거든요ㅡ‘평생 걷게 하는 뼈 만들기’라는 책이 보이더라구요. 나이가 들어서 골다공증 약을 복용하니까 급 관심이 생겨서 걷는 동안 겨우 이십 여분에 하야시 야수후미라는 일본 재활 의학자가 쓴 책을 마스터(?) 했죠. 제 성향상 읽을 책은 절대 아닌데 괜찮아 보이는 운동법도 배웠으니 훌륭한 독서인 셈이죠. 책 읽어주는 유튜브나 북 토크들이 거름망 구실을 해주는 것 같기도 해요. 책이 많은 세상이니 당연히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죠. 관심 있는 분야의 책 중에서도 책 고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에요. 신문 기자들 평이나 명사의 서재, 혹은 책에서 책으로 가 책 읽기 방법이었는데 더 자세한 정보망이 하나 생긴 셈이죠. 책을 읽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머릿속 세상은 한정되어 있고 삶은 별로 변화가 없으니 새로운 정보나 새로운 세상 혹은 새로운 생각들을 접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는 거지요. 책은 내겐 사유의 근원이기도 하고 낯선 여행지이기도 하죠. 책은 지식뿐 아니라 한 사람을 전부 보여주는 현미경일수도 있어요. 풍경이란 정보를 주기도 하지만 풍경에 접근하는 법 풍경을 사색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하죠. 그렇게 낯선 사람, 곳, 사유를  책으로 여행하다 보면 제게도 글을 쓸 수 있는 터가 하나 슬며시 자리하곤 해요.  

 드물긴 하지만 책은 이제 예언자의 자리도 차지하고 있어요. 아 언제나 그랬을까요, 불안한 미래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야 대처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죠. 우리들 때는 없었던 선행학습을 하며 우리 아이들을 피곤하게 하는것두요. 조금이라도 앞서가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어질까요, 앞서가면 불행도 앞서 만나고 죽음도 병도 앞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보긴 합니다만,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 유발된 다원적 시각은 내 신앙관에서는 맞지 않는 일이기에 피해 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몰라도 되는 일이 세상에는 많고 알아서 유익하지 않는 행위들도 많으니까요. 더군다나 모든 것을 경험할 수도 없고 경험이 절대 일수도 없으니까요. 독서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성경과 신앙에 도움되는 책만을 읽고 더 돈독해져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요즈음 생각이 좀 변하더군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이는 세상만 보고 사는 것이 바른 일인가, 지금은 선과 악 일지 옳고 바르고의 이원론적 시대가 아니니까, 이런 양극적인 이야기를 하면 어디서나 촌스럽고 미개한 사람이 되고 마니까, 가령 교회의 젊은이들이나 식자들은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으며 그의 새로운 논리와 정연한 판단에 혹해 있는데... 

 ‘호모 사피엔스’를 읽고 한숨이 났어요. 어찌 이리 과거의 지식을 발판으로 미래를 모든 것을 아는 듯 잘 엮을 수가 있을까, 팩트는 한정되어 있지만 그것을 엮는 방법은 무한대죠. 마치 바둑알은 한정되어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무한한 수처럼 말이죠. 그가 다시 호모데우스를 썼더군요. 신본주의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로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된다는 이야기죠. 태아 때부터 유전자를 심고 질병을 생명공학으로 치료, 수명이 수백 년이 될 수도 있으며 육체적으로는 최고로 아름다워지고 강인하고 지적능력 역시 극대화된 인간 말이죠. 사람에게 칩을 심어 부족한 지식이 혹시라도 있다면 즉시 다운로드 해서 다 알게 되는, 아 모든 지식을 내 머릿속에 다운로드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요, 알던 단어도 잊어버려서 쩔쩔매고, 전두엽이 낡아져 가서 몇 발자국 건너편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고 내가 왜 문을 열었더라, 생각하며 서있는, 이러다 치매가 오면 어떨까....라는 불안이 자주 드는 이 시점에 말이죠. 유발 하라리는 데이터교 이야기를 했어요. 안젤리나 졸리가 수년 전 유방 절제 수술을 했는데 이 수술이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수술이었다고 해요. 물론 좋은 기술로 이전보다 더 매력적인 가슴을 만들긴 했겠지요. 그녀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는 컴퓨터 알고리즘의 예언 때문이죠. 데이터교의 아름다운 여사제가 된 거죠. 페이스 북의 좋아요 70개면 내가 거의 다 드러난다더군요. 그리고 300개 정도면 나 자신보다 더 나를 잘 알게 된대요. 컴퓨터 알고리즘이, 그래서 결혼상대를 이제 컴퓨터 알고리즘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구요. 전에는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봤는데 이제는 나의 소비 취향을 잘 알아서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데이터가 딱 맞는 사람을 정해주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는 어디로 놀러 갈까, 무엇을 먹을까를 검색으로 대신하죠. 이미 데이터교에 들어선 거예요. 호모데우스 시대가 되면 신처럼 된 극소수의 유능한 인간과 유스리스, 쓸모없는 대다수의 사람들 세상이 될거라구요. 

 이런 글들은 정말 우울해집니다. 비관적인 미래에 대한 예언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무가치함에 대한 선명한 인식 때문이지요. 사실 지금도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사람보다 돈이 그 사람 앞서 나타나고 그가 어떤 인격을 지녔는가 보다 명품 옷이 그를 더 잘 보이게 하는 세상이 되어 있어요. 수많은 사람이 읽는 신문 색션지에도 부티크라는 제목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은 넘볼 수도 없는 가격의 물건들이 여러 장 자리하고 있어요. 물론 관심도 없고 형편도 아니기에 들춰보지도 않습니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정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현란한 상술에 혹하기도 하고 그 속에 들지 못해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집에 있는 책도 처리하기 버거워서 도서관을 내 서재로 삼은지가 수년인데 아주 오랜만에 거금 사만 원을 들여서 김용규의 책 <신>을 샀습니다.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글인데 무려 900페이지의 벽돌 책입니다. 근데 재미있어요. 어렵지 않구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지닌 탐욕 즉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을 파악 한 뒤 그 전의 교리와는  다른 처방을 내렸다고 해요. 사랑해야 할 것이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이웃과 물질인데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매우 잘하는 <자기사랑과 물질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자기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온전한 사랑을 하게 한다고요. 이게 요즈음 유행하는 통섭보다 더 멋진 통섭 아닌가요? 작은이야기ㅡ통섭, 소수자, 문화의 다양성, 일상의 중요성, 등등ㅡ들도 열심히 하자. 그러나 큰 이야기ㅡ신과 영웅, 희생과 헌신, 가치, 진리, 선함 등등ㅡ도 열심히 하자.  현재는 몰가치의 시대이지만 다시 가치를 생각해야 설국열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구요. 아주 맘에 드는 대목입니다.  

 독서는 근육을 키우는 일이죠. 몸 근육만 신경 쓰지 말고 마음 근육 영혼 근육을 키우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지,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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