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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Feb 23. 2020

미술관에서

김종영

두 시간여 미술관에는 아무도 없다. 약간의 미로 같은 공간을  부유하는 듯 천천히 다닌다. 미술관의 존재 여부를 생각해 본다. 너무 사람이 없으니까, 하이힐 굽이 마룻바닥과 부딪히는 소리를 연상케 하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생각하며 걷는다. 물론 미술관에 갈때는 언제나 가장 편하고 부드러운 신발을 신는다. 무소르그스키는 미술관 전람회에서 그림 사이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전람회의 그림은 화가 친구의 죽음으로 탄생한 곡이다. 모든 죽음의 자리에서는 기억이라는 새로운 움이 자라난다.   

 블로그를 하며 알게 된 참나무님 생각도 났다. 그이는 거의 날마다 미술관 순례를 하며 글을 쓰는 무명의 문화기자였다. 모두 직접 발로 걸어서 보고 쓰는 것들이었는데 어떤 신문사 문화부 기자보다 더 다양하고 깊었다. 음악이나 미술뿐 아니라 눈에 띄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섬세하게 반응하신 분이었다. 문화 순례자라고나 할까, 나보다 십년 연상이던 그이를 보며 나도 은퇴를 하면 저렇게 자유로운 순례를 하리. 다짐하곤 했는데 어느 겨울 밤 차가 미끄러졌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기약 없는 인생이라는 클리셰한 문구가 죽음을 배경으로 하면 더없이 조촐해진다.     

 

김종영 미술관은 중정이 두 곳이 있어선지 꽤 크게 여겨진다. 커다란 창문으로 비치는 자그마한 정원, 마침 그곳에 벤치가 있어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자작나무가 심어있는 미술관을 여럿 본 것 같다. 대나무는 가느다란 몸피 치고는 상당량의 숲 기운을 지니고 있어서 디자인 하는 사람들이 즐겨 쓴다고 하는데 자작나무는 왜? 하긴 저 하얀 피부는 어느 나무에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하지 않으므로 고급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고요한 정신이 고급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봄을 담은 겨울햇살이 찬연하다. 빛은 멈춰있는 나뭇가지들에게 속삭여서 반짝이는 움직임을 이끌어 낸다. 자작나무 가지가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빛의 산란처럼 여겨지며 빛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게 한다.      

 

 고요하고 적막한 미술관, 그 안으로 들이차는 눈부신 햇살,  아주 작은 시간일지라도 충일해서 단단한 시간의 켜가 내 안에 쌓이는 것 같다.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이런 무위의 시간이 더 깊게 속으로 들이차서 사람을 넉넉하게 만들지 않을까, 이런 고독이 깊어지면 혹시 초연으로 향하는 길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다시  전시관으로 들어선다. 아담한 공간에 딱 맞춤한 크지도 작지도 않는 조각품들이 자리하고 있다.김선생은 모든 조각을 전부 자신의 손길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커다란 작품을 할 수 없었다고, 요즈음 사람들이야 유명작가라면 큰 작품을 할 때 아이디어와 코치만 하는 시대인데, 미술관 전부를 대상으로까지 하는 이즈음의 거대 작품들이 주는 경외감...놀라움,,,은 없어도 조각들은 오롯이 작가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 오직 그만의 것,  한없이 바라보며 한없이 만지다가 나무와 돌 속에 있는 저들만의 생명과 작가의 생명이 부딪혔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작가는 멈추었을 것이다. 기교가 아닌 순수의 어떤 점, 시간, 공간,  어느 한순간이 영원을 만나는 것, 우리의 영혼도 죽은 육체를 떠나 어느 무엇과 만나게 될 것이다.    

 작품을 천천히 보다보니 문득 내 머리가, 생각이, 마음이,  완전히 편안하게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무엇이지? 무슨 뜻이지? 어떤 의미로 이런 작품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마치 저들 조각이 나를 바라보듯 나도 고요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옆으로 스미듯 서보기도 한다.  뒤에도 살짝 들여다보본다. 정이 오가는 시간이라고나 해야 할지, 아주 익숙한 꽃을 보듯 편안했고 조화롭고 부드러웠고 종래는 아름다웠다. 나조차도, 그리 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시간이 조각 속에서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어거지 미술론,  혹은 어떤 사유조차 무화되는 느낌, 철학도 사라지고 없다. 마치 나 역시 미술관의 물질이 된 느낌.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거만하다.자세히 보아주길 원하고 그런 깊은 눈길에서야 아주 살짝 우아한 자태로 조그마한 문을 열어준다. 마치 그래야 격이 있다는 듯이, 김종영의 작품은 문이 없다. 아무나 들어서게 한다. 그는 자신의 조각을 스스로 불각이라고 했다. 깍되 깍지 않는 조각이라는 문장은 깊은 서정과 사유의 확장을 하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돌은 극히 단순한 선을 가지고 있어서ㅡ 그리 단순한데 어떻게 이다지도 마음에 스미는가ㅡ 불각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했다. 소박한 단순함과 정겨운 편안함 속에 어린 깊음이라니, 요란함도 아트도 재능도 어쩌면 사람의 시선조차 의식하지 않는 그저 담박한 존재. 

 그의 손에서 탄생된 작은 돌은 신기하게 세상 것을 잊게 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대하면 뭘 더 바라랴..... 생각이 저절로 들어오는데 나는 그 작은 돌들이 마치 자연이라도 되듯이 달빛이라도 되듯이 아름다운 꽃들이라도 되듯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이라도 되듯이 정월 휘영한 대보름달이라도 되듯이 뭘 더바라랴...를 읊조렸다.     

 

 별관은 사미루四美樓다. 엄청 생각을 하면서 보아야만 하는 현대작품을 슬쩍 건너서  사미루카페로 들어갔다. 김종영 생각의 별채 이름이 사미루였다고 하는데 그곳에 봉숭아꽃과 살구꽃이 많아서 이원수의 꽃대궐이란다.  커피를 마시면서 두터운 도록을 천천히 넘기며 보았다. 

도록에 실린 그의 자서에서 눈에 딱 들어오던 말, 

<극적이고 감정적인 조형요소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다>

<기술은 단순하고 소박할수록 좋고 내용과 정신은 풍부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의 손에서 조각된 그러나 불각인 그의 조각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말이 아닌가, 

<진정한 관중은 자신이다>

이 말은 정직한 구도자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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