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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25. 2021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나는 보통 사람들ㅡ 독서 대신 티비나 핸드폰을 보는 데에 시간을 뺏기는 대다수의ㅡ보다는 

아날로그적이어서 활자로 된 책을 훨씬 더 많이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문학이나 철학등 인문을 벗어나지 못하니 그 협량이 좁다는 한계는 있지만, 


멀지 않는 곳에 새로 시립 도서관이 새로 생겨서 가봤더니 

듬성듬성 꽂혀 있는 책들이 마침 책 쇼핑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보통의 도서관들은 책이 나무 많고 빽빽하게 꽃혀 있어서 아이쇼핑하기도 힘들다.  

책이 아직 적어선지 여백이 있었고 그래선지 이미 읽은 반가운 벗들이 자주 출몰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거기서 만났다. 

프리모 레비라는 이름을 여기저기서 듣긴 했지만, 그의 책은 처음이었다. 

서경식의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대한 책이 집에 있는데

그가 쓴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라는 제목이 생각 난 것은

책의 말미에 있는 서경식이 쓴 작품해설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 아우슈비츠의 생존작가 빅터 프랭클린의 책을 읽었고 

그땐 어려서인지 먼 나라 일, 모르는 사람이 경험한 알 수 없는 일로 여겼다. 

그 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 정찬의 슬픔의 노래를 읽었다. 

그 소설의 큰 줄거리이기도 한 고레츠키의 심포니 <Sorrowful Songs>를 듣기 시작했고

최근 정찬의 에세이를 읽은 후 다시 고레츠키를 아침마다  듣고 있다.

아니 이즈음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슬픔의 노래를 듣는다. 

아주 작은 소리로 시작되는 모든 악장이 렌토인, 슬픔의 노래를 들을 때면 .....

서서히 고통이 차오르는 듯한 

마치 발목과 장난치던 바닷물이 점점 깊어져 종아리로 차오르고 허리춤으로 다가오는 

(나는 수영을 6개월이나 배웠지만, 여전히 물에 못 뜬다, 물이 무섭다)

공포가 증대되다가 

그 공포가 어느 접점에 다다라 사람의 목소리로 대체되며 

슬픔과 비애 그리고 기도로 변한다. 

실제 아우슈비츠 감옥에 새겨진 18살 소녀가 죽기 전 어머니에게 전하는 짧은 글과

헝가리의 민요가 주된 노래이다. 

일본의 모노노 아와레 같은 것이 아닌, 억눌린 절규이자 기도이다. 

생명과 죽음 앞에서, 내게 죽음이 지척에 있다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나에게 다가온다면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래서 슬픔의 노래는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그 영혼 속에 각인된다. 

고통에 있고 슬픔을 필요로 한다. 

티비에 나오는 선남선녀와 예술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와는 전혀 반대된 상황속에서도 아름다움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들에 있는 풀꽃만도 못한 사람의 영화라는, 

만고불면의 진리를 기억해야 이해할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프리모레비는 그 무서운 죽음의 터전에서 살아나와 <증언>을 하다가 

토리노의 자택에서 자살했다. 

이탈리아...토리노는 왜 이렇게 먼 나라 나에게 수시로 출몰하는가, 

토리노의 말들과 니체의 집 그리고 이제 프리모 레비의  무덤이 토리노다.


프리모 레비

 그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옥이, 그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의 사회가, 

그런 지옥이 우리에게 또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시 생각한것 같았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증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글이다. 

증언은 오직 과거의 사실에만 기초하는 단어다. 

증언은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많은 고통과 불합리와 억압이 들어있다. 

누가 기쁘고 즐거우며 화려하고 순후한 일들을 증언하겠는가, 

왜 그런 곳에서 자살하지 않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데,

자살은 사람이 하는 거라고 그는 대답한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고 동물이 되던, 그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살 때를,

자신의 눈으로 보던 그 지옥을 증언하면서 지옥속에서 그는 계속 살아가야 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레비는 다시 인간을 본다. 

새롭게 사람을 직시한다. 

그 감옥 속에서도 여전히 특권층은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는 유토피아에서나 특권층이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조금 더 먹는 풍성한 음식 때문에 그들은 그런 일을 했다고 

그것 역시 권력이었다고, 


권력층은 폭이 좁을수록 외부의 조력자가 필요한데 

역시 아우슈비츠 안에서도 필요했고 그들은 관리자를 뽑았고 

마피아처럼 스스로 죄를 짓게 만들어 돌아갈 길을 차단했다. 

감옥안 사람들 역시 기꺼이 권력에 협조하려는 의향이 확산된다. 

권력 자체에 반하면서도 특권은 증식한다. 

 아유슈비츠에서 실제 죽은 사람의 이빨에서 금을 빼내고 옷을 벗기고

(그옷들은 독일군 장교들의 아이들에게 입혀졌다) 

시체를 처리한 사람은 바로 아우슈비츠에 잡혀 온 유태인이었다.

그들은 화장터를 운영했고 시체들을 화장터로 운반했고 

시체를 태우는 화로의 작동을 살폈고 재를 꺼내 없애야 했다. 

그들의 수는 수백명도 되었지만 

결국 그들의 직종은 계승됨과 동시에 제거되었다. 

새로운 신입자들은 전 툭수대원의 시체를 불태워야 했다. 

ss에게도 양심의 가책을 더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들 중의 증언. 

그일을 처음 하게 된 사람은 둘 중에 하나다 미쳐버리거나 적응해야하는 일, 

우리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다. 

그 감옥과 화장터는 누가 지었을까? 

한나 아렌트의 평범의 악까지 가지 않더라도

유럽의 누군가가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 지었을 것이다. 


증언을 듣지 않는 시대

인간의 악에 대한 성찰이 사라져버린 시대

자신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삶이 마치 연기처럼 산자락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볼 때 

자살하지 않고 버틸수가 있었을까,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삶의  목표가 이해하기 라고 했다. 

독일을 이해하고 과연 이런 일들이 인간사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하여 산다고 했다.  


레비는 수용소에서 단테의 오디세우스를 누군가에게 암송해주었다고 했다.  

 ‘태양의 뒤,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 그 경험을 거부하려 들지 마라! 

그대들의 씨앗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지옥 26곡 116~120행)’


(이런 책은  리뷰 쓰기가 엄청 힘들다. 다시 마음이 동할 때 한번 더 읽으리라 ) 

                                               1941년 자전거를 타는 프리모 레비

                                          수용소 풍경

평범의 악인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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