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Nov 13. 2021

새벽 세 시

독서와 여행







홍천 가리산 휴양림의 밤이었어요. 

늦게 잠이 들었나 싶은데 깨어 있더군요.

 평생 나를 충전시키던 잠의 깊이가 얕아진 것은 내 배터리가 시원찮아 진 것일까, 

무엇이, 어떤 존재가 있어 깊은 잠속의 나를 불러 낸 것일까, 

작은 충전으로 가늘게 살아가라는 사인일까, 

혹시 가을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내 몸을 깨운 것일까, 

그렇다고 깊은 밤에 별을 보러 나가기에는 무서웠어요.

 새벽 세 시였거든요. 결국 핸드폰으로 E-북을 읽기 시작했어요. 

김멜라(요즈음 젊은 작가라선지 이름도 남다르죠)라는

 젊은 작가의 <나뭇잎이 마르고>라는 단편소설이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말짱한 정신이 더 말짱해지더군요.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나무 십자가와 살짝 연결하는 듯 시작하더니 

그 나무를 또 몸이 성하지 못한 화자의 친구 ‘체“로 잇고 

산비탈에 서 있던 메마르고 병들어 보이던, 

열매 맺는 일이 고달프다는 듯 꽈배기처럼 몸을 뒤틀며 자란,

 그러나 가지에 달린 잎만은 꿀을 바른 듯 윤기 나는 그 나무로 이어지더군요. 

그러더니 작가의 말에서 그래요. 

타당한 이유 없이 나무를 마르게 한 존재는 마찬가지로

 마땅한 이유 없이 병든 사람을 낫게 한다구요. 

왜 라는 질문 속에서 살았지만

 답을 모르고 사는 힘도 필요하고 답이 없다는 것의 기쁨을 배우고 있다구요. 

평생 주님의 임재를 소망하며 살다가 

이제 그 임재를 사방에서 느끼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저 젊은 작가는 답이 없다는 것의 기쁨을 벌써 알고 있네요. 


<세계는 하나의 책이다/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는 사람이다>

성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모든 비유가 그렇듯이 세계가 하나의 책이란 거대한 비유는

깊은 사유가 뒷받침되어야만 나올 수 있는 문장이죠.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메르트스의 ‘내 방 여행 하는 법’이란 이란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나이는 저절로, 정말 저절로, 모든 개념을 확장하고야 맙니다. 

하물며 여행만 꼭 책이겠습니까,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와 시간,

계절과 빛은 우리를 무한대로 떠나게 하는 여정도 책이죠.

 가령 매일 대하는 식탁에서 쌀밥을 응시하는 순간이 있죠.

 고슬거리며 빚어내는 표현하기 어려운 윤기, 

그 우아한 흰 빛 사이로 이슬에 젖은 노란 벼 이삭이 떠오르곤 해요. 

벼 이슬로 세수를 하면 예뻐진다는 옛이야기는 부지런함에 대한 찬가이겠죠.

 아, 교과서에서 배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식상한 이야기도 떠올라서 살짝 김이 새기도 하죠.

 아주 어렸을 때 이른 봄 어느 한순간 

자운영꽃이 가득 피어나 보랏빛 논으로 변할 때가 있어요. 

자운영을 갈아엎으면 그대로 논에 좋은 비료가 되었었죠.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젊은 엄마는 자운영 나물인 ‘풀씨 노물(자운영 나물의 보성 말)’을 

아침 시장에서 사와 고추장 된장을 넣고 살짝 새콤 살짝 달콤하게 무쳐 주셨는데 

이제는 먹을 수 없는 그립고 향기 나는 ‘노물’이 되었어요. 

모를 심기 위해 물을 쟁여 찰랑거리는, 

가까운 세상의 모든 것을 반영하는 논물의 너그러운 모습도 떠오르곤 해요. 

설마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반영을 보았을까요, 

몇 년 전 혼자 경주 여행을 했을 때 길옆에 있던 논에 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야트막한 논물이 저 건너편의 산까지 품고 있는 것을 본 거죠. 

저렇게 품이 넓고 깊어서 생명 자체인 벼를 길러내는구나, 

나만의 작은 연결을 체득했다고나 할까요. 

알맞게 뭉쳐서 툭툭 던져 놓은 못단, 이제 못단 던져 놓은 모습도 사라졌네요.

모두 다 기계로 해버리니, 

유월의 훈풍에 숙숙 자라는 아름다운 벼,

 성장하는 초록은 얼마나 멋지고 싱싱한가요. 

어느 순간 그 작은 모들이 숙숙 자라나 단색화가 되죠.

 얼핏 초록으로 보이나 전부 다 결 다른 무한초록의 색들! 

어느 화가가 그토록 거대한 화면을, 아름다운 순간을,

그 넓은 벌이 농부와 함께 거하는 시간을 그려낼 수 있을까요. 

밥은 그런 긴 여정을 지나 내 식탁 위의 나를 위한 나만의 밥이 되었습니다. 

나를 살리고 

나를 생각하게 하고

 나를 움직이게 하며 

나를 늙게 하는 밥. 

그러고 보니 사는 것 자체가 책이고 살아가는 근원이 여행이네요. 


독서도 하시고 더불어 사유도 하시면서 만추 잘 보내고 계신 거지요?



작가의 이전글 단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