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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16. 2023

악기의 왕 파이프 오르간

부천 아트센터

유럽의 어느 도시에선가, 

오래된 성전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하강하듯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장엄하게 울려 퍼지며 성전을 가득 채우던 파이프 오르간 소리. 

층고가 높아 연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성전은 화려하고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음악은 그 공간을 채우고도 남아 

거기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의 문을 살짝 열어준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 그렇다. 굳이 표현을 알알이 해보자면 마치 음악이 빛이 되어 빛내림ㅡ 그것도 아주 강렬한ㅡ 현상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공간이 부유하는 듯, 다른 공간ㅡ 음악의 세상으로 진입하는듯한 듯한 느낌, 

사실 음악은 무형의 세상이다. 

실체가 없고 공간이 없는 세상, 

그래서 신의 세상이라고 베토벤은 말했을 것이다. 

음악의 공간을 실질적로 체험한 느낌, 

음악이 현세의 공간을 넘어선 공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체득한 순간이라고 할까, 


 

해저물녁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우리 동네 지하철은 지하철이 아니라 지상철이다. 

일몰의 햇살이 옆으로 길게 눕듯이 나무들을 비추고 있다. 

지인의 세컨 하우스에서 이른 아침 숲을 마주할 때 왼쪽에서 햇살이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햇살이 많이 비추는 곳은 연두색이었고 그다음은 초록 그리고 더 깊은 어둠, 

어디든 다 비추는것 같지만 빛이 들이차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일몰의 햇살은 지금 그 반대편의 나뭇잎들을  비추며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 해도 이리 공평한 것이다. 


이제 나는 세상 속에서 

아주 하잘것없는 것들에서도 공평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공평의 시각은 소유를 벗어난 삶에서 시작된다.

아, 물론이다. 거기 어디 완벽이 있으랴먄, 

적어도 자신의 작은 삶에 감사할 때, 

즉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을 때 발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부천 필하모닠 오케스트라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다.

좀 일찍 가서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앉아 프로그램 북을 읽는 것은 꼭 필요하다.

순서와 연주되는 곡, 

그리고 연주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음악을 기대하는 시간, 

이상하게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인데 연주자에 대한 프로필이 아무리 찾아도 없다.

실수일까, 아니면 갑자기 연주자가 대체된 것일까, 

어찌 되었든 연주자의 기분이 별로일 것 같아서 살짝 걱정된다. 


문이 열리고 단원들이 들어선다. 

자유스러운 블랙 옷차림, 악기를 든 그들의 모습, 각양각색이다.

가장 흥미로운 시간은 박수를 받으며 들어서는 악장의 사인으로 각자의 악기들 음을 고를 때다. 

그 완벽한 불협화음들은 기이하게도 음악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고양시킨다.

그리고 조용해진 다음 마에스트로가 등장한다. 

박수와 인사 그리고 뒤돌아서서 다시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순간, 

‘자, 나는 어디든 비상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사실 음악회에 가서 창작곡을 듣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더 기대했다.

이신우의 창작곡 <내면의 빛으로의 전주곡> 고요하고 정적이며 명상적이고 추상적이었다. 

작곡가는 이곡이 슬픔과 아름다움 빛과 그리고 거룩에 관한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더불어 선율을 지운 소리 덩어리라고 했지만 

내겐 장엄함 보다는 섬세하고 그윽한 오르간의 미모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작품 말미에 바흐의 ‘예수 우리의 기쁨’이 연주되었는데 

거룩에 대한 작곡법적 상징이라고 작곡가는 썼다. 

이제는 거의 찬송가의 선율 같은 곡, 

무대 위에서 연주 하던 중 천상의 여행을 떠난 유명 연주가의 마지막이 기록되어 더 영적인 곡,



2부에

알프레도 카셀라의 교향곡 2번이 연주되었다. 곡은커녕 작곡가의 이름도 처음이었다.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지휘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카셀라라는 이름은 단테의 신곡에 나온다고 살아 생전 단테의 시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었는데 

죽었고 죽음의 세상에서  단테를 만나게 된다고, 

단테는 다시 카셀라의 노래를 청해 듣는다고,  


 카셀라는 오페라가 중요한 장르였던 19세기, 교향곡을 꿋굿하게 작곡한 사람이었다. 

말러와 스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내 엷은 귀에도 말러가 자주 느껴졌다. 

그러나 말러보다 더 유머러스하다고나 할까, 

특히 2악장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가 아주 재미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점점 더 차오르면서 금방이라도 하얀 튀밥이 팡 터질 것 같은 느낌.


 좋아하는 영화중의 하나인 

<신과 함께 가라>에서도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나온다. 

가톨릭에서도 처음 단성부 찬양만 부르다가 다성부 찬양을 하는 칸토리안 수도원이 생겼다. 

그들을 이단이라 규정하고 칸토리안 수도원은 쇠락해 간다.

영화는 그 쇠락해가는 수도원 내의 수사들이 주인공이다.

결국 단성만 주를 찬양한다고 믿고 있는 성전에서 아름다운 다성의 찬양이 울려 퍼진다. 

<주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만 바라며~> 

그 아름다운 찬양이라니....... 

우리도 한 때 어떻게 감히 예배당 안에서 기타를! 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소소한 것들에게 대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빙증하는 것 아닌가.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든 생각

문득, 우리 죽음 후에, 이런 음악을 듣기도 하겠네. 

죽음 이후의 세상을 도무지 알 수 없으나 성경이 계시록에 

혹은 성경 속 사람들을 통하여 조금씩 보여주고 있는 그 알지못할 세상. 

그 세상에 음악이 가득할 거라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단테 같은 사람을 통하여 예시해주고 있지 않는가. 


음악이 준 통찰! 


 


https://youtu.be/b8eggQiYNqM?si=4GJBTpq2qExsGK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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