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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11. 2024

easy beauty

2년에 걸쳐 클로이 쿠퍼 존스<이지뷰티>를 읽었다.

연말에 책을 빌려서 년 초까지 읽었으니 그렇다.

책은 정말 재미있었지만, 

그래서 예전이라면 하룻밤쯤 날을 새면 

거뜬히 읽을 책인데도 그냥 여러 날 걸쳐서 읽었다. 

아껴 읽은 면두 있다. 

좀 느리게 가야 하는 느낌을 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쉬운 아름다움 ‘easy beauty’ ‘어려운 아름다움(difficult beauty)’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를 현대인들은 한도 없이 다양한 변주로 해석해낸다.

성실이 무슨 가치야, 없는 사람들의 위로지.

교훈? 교훈은 없어 인생은 케바케야. 

토끼는 금수저지, 그러니까 낮잠을 자거나 편히 쉬어도 돼. 

지는 것? 져두 괜찮아. 뒷빽이 있잖아. 

거북이가 열심히 갔는데 목적지에는 아무도 없다. 

혼자 열심히 삽질 한 것이다.

거북이가 갈 때 토끼가 잠을 자고 있었으니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깨어서 같이 가야지. 

물론 깨우지 않아서 비난받을 일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시작부터가 문제다.  

지체장애인과 달리기 선수가 경주하는 꼴이니, 

그러나 누군가 실제 토끼와 거북이를 시합을 시켰더니, 

거북이는 꾸준히 가고 토끼는 자꾸만 옆으로 새려고 해서 

거북이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

 

결국 무수한 다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름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고, 너그럽게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 다름에 

사람들은 거의가 다 모두 그리고 나역시 냉혹하다.

이지뷰티는 그런 나를 직시하게 한다. 

작가 클로이 쿠퍼 존스는 장애인이다. 

“‘나는 진짜가 아니었다. 그냥 골목길의 이상한 물체였다.”

척추와 골반을 연결하는 뼈인 천골(엉치뼈)이 없어 그녀는 난쟁이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클로이는 그 다름으로 인해 <배제의 도끼>에 노출되고 

무시로 사방에서 도끼질을 당한다. 

나 역시 배제의 도끼를 지니고 있다. 

아니 겉으로는 아니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두운 눈망울을 음험하게 돌리면서 판단하는,

턱없는 연민도 배제의 도끼 날이다. 

그러니 얼마나 수많은 배제속에서 살아온것일까, 

더군다나 누구보다 총명하고 통찰력 있으며 사람을 읽는 시선이 있는 여인이, 

그래서 그녀가 택한 삶의 방법이 있다. 

우선 오랜 기다림.

자신의 장애가 타자에게 무뎌질만큼 오랜 시간을 인내한다는 것. 

“나는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것, 나의 중심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나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클로이는는 <중립의 방>을 만든다. 

어둡지만 고요한 방, 고독하지만 그들보다 우월한 방.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것, 

나의 중심에 홀로 존재하는 것,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육체로부터 정신을 분리하기 

즉 경험을 추상화해서 이론으로 만들며 우월감을 느끼는 일은 존스에게 익숙한 방어 기제였다.

그녀는 삶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철학을 찾아간다.

그래서 철학 교수가 된다. 

플라톤의 렌즈를 통해 보면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는 것을 영광의 표지로 재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플라톤의 이론을 비틀어서 방패 모양으로 변형했다. 세상에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나를 더 훌륭하고 더 현명한 철학자로 만들어주고, 내 영혼은 금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은 철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이론들은 우월의식을 내포하고 있었고, 내가 그 우월의식을 받아들이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아래로 추락하지 않고 높이 떠 있을 수 있었다. 삐딱한 태도는 절망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됐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세상과 거리를 두고 존재해야 한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쪽이 낫겠지.’

 

이런 미적 감각위에 

대중가요 같은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그녀가 

비욘세의 콘서트에 가게 된다. 

비욘세가 노래할 때 함께 하는 인간의 바다는 그녀와 함께 하는 하나의 유기체 

현재의 절대성을 보여주며

지금 여기의 상태로 진입하게 만들었다.

이지 뷰티의 몰입, 아름다움을 그녀는 새롭게 깨닫는다. 

자신이 지닌 지성 기술 유머 선행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추함을 완화하는 방편으로 여기던 것, 

아름다움은 외적 속성들의 집합이 아니라 

깊이 사색하는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흉의 이론을 선호한다. 

그러나 일몰의 호숫가에서 흔하디 흔한 야자나무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했던 것은

자신이 그런 아름다움에서 배제됐기 때문이 아닐지 깨닫는다.

일종의 자서전일수도 있고 회고록일수도 있는 글,

그러나 그안에 놀라운 통찰력과

 예술에 대한 비평, 미학, 철학이 자리하며 

불편한 몸으로 홀로 하는 여행기일수도 있다. 

그녀는 철학교수면서도 테니스경기를 취재하는 잡지사 기지로도 활동하고 

영화제 기사도 쓴다.

 그녀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방어기제로 자신의 삶을 이루어 왔지만 결국 그 방어기제를 

몸으로 정신으로 깨뜨리며 전진하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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