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Jan 22. 2024

여덟 개의 산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나면 왜 이렇게 좋은 영화를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것일까.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여러번 클릭했지만 고양시나 파주 쪽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극장 상영은 끝났고  다운로드를 해서야 봤는데 하나의 미덕은 있었다.

궁금한 대목을 다시 리플레이 해서 보는 것,  

 마지막 브루노가 실종될 무렵,

산은 나를 절대 해치지 않아 라는 말을 하며 겨울 산에 남는 부르노, 

브루노가 하얀 산 위에서 아주 작은 점이 되어 간다.

그리고 피에트르에게 날아든 부르노의 실종 소식.

못 본 사이에 눈사태가?

다시 보니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부르노는 산을 걷는 동안 카메라는 멀어졌고 부르노는 점이 되더니 결국 사라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예시라니......

사실에 대한 표현이라니,

미래와 현재를 아우르는 극진한 컷이라니,  

산을 사랑하던 부르노의 삶을,  죽음을, 다 보여주던 정점. 

 그런 시선을 지닌 감독이 만든 영화니 곳곳에 빼어난 장면들이 많다. 

얼리 때 만나 순수한 우정을 나눴지만 헤어지게 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그 둘은 다시 만나 아버지의 꿈이던 깊은 산에 집을 짓기 시작한다. 

산을 싫어하던 피에트로는 집을 지으며 다시 우정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산을 좋아하게 되고 산길을 잘 걷게 되고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무너진 집터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를 파서 옮겨심는다. 

 잘 자랄까? 궁금해 하는 피에트르에게 부르노가 말한다.

태어난 곳에서는 강한 데 옮겨 앉은 곳에서는 약한 나무다. 

삶에 대한 은유가 참으로  서정적이면서 다양하다.   

빙하는 산이 우릴 위해 간직한 겨울의 기억이라는 대화도 뇌리에 남는다. 

빙하를 표현한 아름다운 문장.         

히말라야를 다녀오며 피에트리는 브루노와 가족들에게 네팔의 조장 이야기를 한다.

다들 놀라워 하지만 브루노는 아, 새에게 자신을 주는 것, 좋네. 말한다.

봄이 오며 눈과 얼음이 녹고 산 위 계곡의 물들이 세차게 흐른다.

새 몇 마리가 산 위에서 무엇인가를 쪼아 먹고 있다. 


산은 이 영화 속에서 중의를 지니고 있다. 

그냥 정말 아름다운 산,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경이로운 산과 

삶을 은유하고 있는 산이다.

<여덟 개의 산이 있는 세상 

그 중심에는 가장 높은 수미산이 있어. 

가장 높은 수미산에 오른 사람과 여덟 개의 산을 다 여행한 사람 중에 누가 더 많이 배울까?>

브르노와 피에트리의 삶을 굳이 여덟 개의  산이나 수미산으로 나눌 일은 아니다. 

 다들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그래서 선택을 한 산을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브루노가 어느 때는 피에트르가 산을 잘 오르는가 싶지만 

삶에 무슨 <잘>이 있을까.     

행복한 브루노의 시간도 있고

부르노는 피에트르의 책을 읽으며  

슬픔에 대한 단어가 이리 많은가,

단어가 빈곤하다는 것은 생각이 빈곤하다는 것이라며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갈뿐이다. 

회한과 슬픔 고독은 그래서 삶의 가장 진득한 벗이 된다. 

산은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품어주며 다시 힘을 얻게 하는 존재다.                

생략과 절제가 어우러진 영화다.

피에트르의 내레이션도 작고

설명이 적어 오히려 생각하게 만든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산들도 마치 여백처럼 작용하며 

그곳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호흡을 함게 할수 있다. .   


높은 산, 설산의 산그리메가 한도 없이 펼쳐진다. 

그 아름다운 산 앞의 작은 점들 인간.

점이지만 그 관계 속에서 산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최근들어 가장 기쁘게 본 영화 강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