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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Jun 23. 2016

몽상가들의 도시, 옹플뢰르

프랑스 깔바도스주 소도시 옹플뢰르 Honfleur



  노르망디 교를 건너 도착한 옹플뢰르. 이곳에 오기 위해 오매불망 기다린 마음들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맑게 개인 하늘과 옹플뢰르의 파란 항구는 반갑게 나를 맞았다.





외젠 부댕과 옹플뢰르파

Eugène Boudin et École de Honfleur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옹플뢰르 시가지를 향했다. 노르망디 교에서 이어지는 한적한 도로는 다른 도시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자 나타난 오래된 거리를 보자마자 나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저마다의 색을 가진 작은 집들이 빈틈없이 붙어 나란히 길을 내고 있었다. 이 집들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물 사이에 틈이 없이 지어졌다. 색이 짙고 검을수록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이다.



Eugène Boudin - Honfleur


  옹플뢰르는 아름다운 도시인만큼 예술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곳은 이미 인상파의 거장 끌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스승인 외젠 부댕(Eugène Boudin)의 고향으로 이름이 나있다. 부댕은 화가라면 아뜰리에 안에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바깥으로 나와 빛의 색채를 표현하기 시작한 선구자이다. 그는 모네에게 자연광을 표현하는 법을 연습하도록 했다.




Jean-Désiré Gustave Courbet - Honfleur

  그를 따르는 많은 화가들은 옹플뢰르를 화폭 안에 담았다. 모네와 부댕 외에도 사실주의 화가인 구스타브 쿠르베( Jean-Désiré Gustave Courbet)와 네덜란드 출신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 역시 옹플뢰르의 아름다움에 반해 있었다. 그들을 곧 옹플뢰르파派라는 뜻의 에꼴 드 옹플뢰르(École de Honfleur)라 불렸다.

  과연 그들을 아뜰리에 바깥으로 이끈 힘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이곳 옹플뢰르에 있을지도 모른다.








감사의 선물, 생 카트린 성당

Église St. Catherine



  옹플뢰르의 랜드마크인 오래된 교회당, 생 카트린(Église St. Catherine). 이곳은 백 년 전쟁이 끝난 것을 기념해 모은 거주민들의 푼돈으로 지어졌다. 프랑스 건축물로는 특이하게 목재로 지어졌으며 완공 후에는 4세기 프랑스의 가톨릭 성인이었던 성 카트린(St.Catherine d'Alexandrie)에게 바쳐졌다.

  생 카트린 성당은 특이하게도 종탑과 예배당 두 곳으로 나뉘어 지어져 있다. 옹플뢰르는 과거부터 번개가 많이 내렸다. 신도들은 갑자기 내리는 번개로 성당에 불이 붙을 것을 우려했고 예배당 옆에 높이 솟은 종탑을 지어 그 위로 번개가 떨어지도록 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 봤다. 천장을 보면 위로 높이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배 두척을 뒤집어 놓은 모양을 띠고 있는데 당시 조선 사업으로 번창하던 옹플뢰르의 조선 기사들이 배를 만드는 기술을 이용해 성전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생 카트린 성당은 프랑스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목재 성당으로 인정을 받아 프랑스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바다로 나가는 문, 옹플뢰르 항구

Portes De Honfleur





  옹플뢰르(Honfleur)의 어원은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프랑스어로 꽃을 의미하는 Fleur, 옛 노르웨이어로 조수를 의미하는 Flod, 또는 스칸디나비아어로 강이 교차하는 곳을 의미하는 Flói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옹플뢰르가 센 강과 대서양의 물줄기가 만나는 여울에 위치해 있다는 점으로 볼 때 Flói에서 옹플뢰르의 어원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데 무게가 쏠린다.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모험가들은 옹플뢰르 항구로 모였다. 젊은 모험가들은 저마다 신대륙을 향한 꿈을 품고 항구 너머 영국에 맞닿는 라망슈(La manche) 해협으로 빠져나갔다.

  캐나다 퀘벡에 최초로 정착한 프랑스 탐험가 사무엘 드 생플랭(Samuel de Champlain) 역시 1608년 옹플뢰르 항구를 통해 모험을 떠났다가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퀘벡시에는 생플랭의 동상과 옹플뢰르라는 마을이 있다.




멀미약을 최초로 개발한 Pharmacie du Passocean

  옹플뢰르는 규모가 큰 항구였다. 11세기부터 영국에 포도주를 수출하기 시작했고, 12세기 중반에는 루앙에서 영국까지 교역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14세기 백 년 전쟁 시기에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신 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육지 바깥으로 나설 꿈에 부푼 모험가들이 줄지어 모여들었다. 18세기부터는 북유럽과 영국으로의 이동이 용이하다는 장점 때문에 무역항으로 발달하기도 했다. 덕분인지 옹플뢰르 마을 초입에는 뱃멀미 약을 최로로 개발한 약국이 있다.






옹플뢰르의 맛, 뮬과 깔바도스

Moules et Calvados





  옹플뢰르 항구 앞에는 식당가가 줄을 잇는다. 옹플뢰르의 유명한 먹거리는 뮬(Moules)인데 홍합을 소스에 쪄낸 요리다. 나는 항구 끄트머리 쪽에 위치한 조용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자외선이 강해서 바깥으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항구가 잘 보이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소고기 스테이크와 칩스, 크림 뮬과 크로넨버그 1664 두 병을 주문했다. 요리는 모두 합쳐 32유로로 저렴했다. 뮬 요리는 처음 먹어보는 거라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걱정과는 달리 맛이 좋았다. 좋은 곳, 좋은 날씨, 좋은 음식까지. 여행의 참 묘미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식당가 앞은 노천에서 점심을 즐기는 유러피언들로 붐볐다. 식탁 위에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등 여러 유럽 국가의 언어로 된 메뉴판이 깔려 있는 것을 보니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여행지인 것 같았다. 그들은 저마다 옹플뢰르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젖어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옹플뢰르는 사과주가 유명하다. 깔바도스(Calvados)라고 부르는데 주(Région)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 지역 특산품인 만큼 어딜 가나 깔바도스를 판매하는 상점이 많다.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시음해볼 수 있으니 맛을 보고 구매할 수 있다.

  나는 술에 관해선 문외한이어서 테이블 위에 세워진 깔바도스 병들 중 가장 먼저 눈에 차인 것을 가리키며 시음을 부탁했다. 뭣도 모르고 마신 사과주의 도수는 40도였고 나는 원치 않게 깔바도스의 매운맛을 봐야 했다.





  예술인들과 탐험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옹플뢰르. 부댕은 그림을 그렸고 생플렝은 신대륙을 찾아 발돋움했다. 유에서 무를 창조해내는 기쁨을 아는 몽상가들은 지금도 이곳에서 단 꿈을 꾼다. 청년들의 활기가 넘치는 옹플뢰르에서 나는 위대한 사람들의 꿈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의욕이 없어 삶의 도전이 필요할 때 옹플뢰르를 방문해보자. 그곳에서 당신은 새로운 마음을 선물로 안고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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