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J Jul 04. 2016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빛과 색을 사랑했던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생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면 많은 이들이 자리에 멈춰 서서 감상하는 데에만 긴 시간을 할애하는 작품이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인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수련(Waterlilies)이다.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빛의 색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가 십 년 동안 붓질을 멈추지 않고 완성시킨 수련 연작의 무대, 그 봄의 향연을 직접 만나러 지베르니(Giverny)로 향했다.



  쌀쌀한 날씨가 지나가고 꽃이 움트는 초봄을 지나 녹음이 진 5월, 지베르니에 위치한 모네의 정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매년 50만 명 이상의 여행자들이 방문하는 규모가 큰 관광지로, 노르망디에서는 몽 생 미셸 다음으로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대문 옆에는 모네의 정원 지도가 걸려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넓은 정원 안은 모네가 살았던 생가와 꽃의 정원, 물의 정원 등이 있다.






꽃의 정원

Jardin de fleurs



지베르니, 꽃의 정원



  모네는 1883년부터 1926년 숨을 거둘 때까지 43년을 이곳 지베르니에서 지냈다. 꽃의 정원은 화가인 동시에 원예가였던 모네가 직접 만들고 관리했던 곳인데, 8000제곱미터로 그 넓이가 상당하다. 코티지 가든의 모습을 띤 정원에는 양귀비, 아네모네, 수선화, 라일락, 튤립, 아이리스 등 이름을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꽃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루며 피어 있다. 어떻게 보면 돌봄이 필요 없어 보일만큼 제멋대로 자라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조화가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네는 청년 시절 노르망디를 여행하던 도중 베르농(Vernon)에서 지조르(Gigors)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그 길목에 있는 지베르니를 발견했다. 그는 한눈에 이곳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1883년 거처를 옮기기에 이른다. 모네는 사과나무 과수원이었던 지금의 집 터를 구입하고, 그 옆에 딸린 분홍색 건물을 함께 사들였다. 조경과 조예가 깊었던 모네는 그의 입맛에 맞게 꽃과 나무를 심어 지금의 아름다운 '꽃의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을 거닐다 보면 카메라 셔터를 멈출 수가 없다. 화각 안에 잡히는 것마다 그림이고, 예술이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행객들은 꽃의 정원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감상을 나누거나 사진을 찍고, 또 조용히 감상했다.








모네의 집

 La maison de Monet



모네의 생가



  긴 줄을 기다려 도착한 모네의 집. 초록색으로 칠해진 창문과 분홍빛의 건물은 모네의 독특한 개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모네의 정원 입장 티켓




  모네의 집에는 그가 생전에 수집했던 일본의 풍속화와 우키요에 판화가 유난히 많이 걸려있다. 당시 반 고흐를 포함한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포니즘(Japonism), 즉 일본 문화를 사랑했다. 모네의 집에 있는 일본 작품들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그려진 것들이며 그 수만 200점이 넘는다. 이 가운데는 키타가와 유타마로(1753-1806), 카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 그리고 유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작품들도 있다. 사실 모네의 집에 있는 일본식 작품들 중 원본은 없으며, 이는 모두 사본이다. 원본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모네 미술관 (Musée Marmottan Monet)에 전시되어 있다.





  왼쪽은 모네가 숨을 거둔 침실이다. 모네는 창 밖을 내다보면 그의 정원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을 침실로 삼았다. 실제로 모네의 침실에는 커다란 창이 나있는데 그 밖으로 모네의 집 전경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다.

  오른쪽은 모네의 그림들이 창문을 제외한 삼면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응접실이다. 원래 이 응접실은 모네가 1899년까지 작업을 몰두했던 그의 첫 번째 작업실이었지만 나중에는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응접실로 탈바꿈했다. 방에는 영국 식 소파가 놓여 있고 벽엔 모네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모네의 부엌은 벽면이 모두 루앙(Rouen) 스타일의 타일들로 채워져 있다. 이 타일은 독특한 모네의 감성이 잘 드러나 있어 많은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좋은데, 기념품샵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이는 가구들을 칠한 푸른색 페인트와도 잘 어울린다.

  부엌은 모네 생전에 가족들이 사용하던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데, 레인지와 오븐 위에 놓여있는 냄비나 팬은 구리로 만들어져 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일본식 화분에서도 모네가 사랑했던 자포니즘을 엿볼 수 있다.




  식당 역시 모네가 생전 사용한 그대로 복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노란색으로 꾸며진 집 안은 당시에는 아주 모던한 것이었다. 벽에는 일본식 목판화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키가 큰 유리 찬장 안에는 푸른 도기 그릇과 모네가 특별히 주문 제작한 노란색, 파란색 식기 세트가 진열되어 있다.







물의 정원

Jardin d'Eau





돌연 마법처럼 내 연못이 깨어났다.
난 홀린 듯 팔레트와 붓을 잡았고,
다시는 그보다 더 멋진 모델을 만날 수 없었다.



  모네는 그의 스승인 외젠 부댕(Eugene Boudin)으로부터 빛과 색을 잘 그리는 법을 전수 받았다. 그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면서 매 순간 달라지는 빛의 색채를 독특하게 표현했다. 그런 모네에게 수련 연작을 완성시킨 지베르니의 정원은 그의 뛰어난 표현력을 극대화시켜줄 완벽한 모델이었다.





    모네는 1893년 자신의 정원을 더 넓힐 수 있도록 그 옆에 대지를 구매했다. 그는 물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고, 수련을 심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일본식 아치형 목재 다리를 설치했다. 그 뒤로 모네는 자기가 만든 물의 정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수련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련 연작은 그 수가 무려 250여 점에 이르며, 이는 제1차 계 대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그려졌다.



수련 연작 앞에 모네

  말년에 모네는 물의 정원에 설치된 연못에 몰두했다. 그는 일곱 명의 정원사와 함께 정원을 가꿀 만큼 그곳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그린 작품들은 수련 연작과 같이 벽화만 한 초대형 캔버스에 그려졌다. 안개나 반사된 빛 등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색감 그리고 모네만의 두터운 붓터치가 독특하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

  모네는 자연광을 받은 모습 그대로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서양의 풍경화보다는 동양 미술을 사랑했다. 그중에도 특히 일본 목판화에 빠져 있었는데,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건초더미'(1888~94), '포플러'(1892), '루앙 대성당'(1892~94) 연작이다. 이 그림들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는 순간들을 포착해 표현해낸 작품들이다.

  모네는 물감을 섞기보다는 원색 그대로를 사용해 겹쳐 그림으로써 색깔을 내거나 생생한 명암 표현으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당시 화가들이 사용하던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상파로써의 새로운 지표를 꽂은 셈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미리 머릿속에 그림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모네는 백내장으로 시력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를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변명거리로 삼지 않았고, 나아가 추상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왼쪽 눈은 심한 백내장으로 노란색과 붉은색만을 볼 수 있었고, 오른쪽 눈은 수정체가 없었기 때문에 보라색만 볼 수 있었다. 나중에는 물과 식물, 하늘의 구분이 흐려졌다. 모네는 이를 장애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예술로 승화시켜 캔버스 위에 맘껏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네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완성시켰고, 후기 추상화에 영향을 미쳤다.


모네의 집 선물샵에서 구매한 지베르니 마그넷

   지베르니에서의 여행은 작품이 만들어진 당시의 감성과 무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그것은 직접 그림을 감상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모네의 집은 사랑스러웠고, 꽃의 정원은 생동감 넘쳤으며, 물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작품을 보고 단지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던 모네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고 온 것이다.

  꿀을 따러 날아든 나비를 따라 일본식 목재 다리를 건너면 못 앞에 앉아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붓 질을 하는 백발 노인의 뒷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는 나이 듦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예술로 승화시킬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천재적인 예술성뿐 아니라 죽지 않는 열정을 배웠다. 그 힘이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때까지 후세에게 존경받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다가 주는 선물, 에트르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