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인의 테넷 / 2023년 3월 호 칼럼
애플에 조니 아이브가 있다면, 마이크로소프트에는 앨버트 샴(Albert Shum)이 있다. 그는 나이키에서 15년간 프로덕트 이노베이션 디자인을 맡아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고, 아이폰 1세대가 공개됐던 2007년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했다. 지난 2022년 말까지 윈도즈와 윈도즈 디바이스 등 마이크로소프트 주력 비즈니스의 디자인 총괄을 지낸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중흥을 함께 리드한 디자인계의 레전드로 꼽힌다. 그런 그가 지난해 말 현업 은퇴를 선언하며 지난 30년간 디자이너로서 쌓아온 커리어를 마무리 지었다. 세계 최고 기업의 디자인 수장으로서 그가 걸어온 커리어와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 지난해 12월 시애틀의 한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상인: 앨버트, 오랜만이다. 반갑다.
앨버트 샴: 반갑다. 우리 직접 만나는 건 2년 만인가?
이: 그렇다. 코로나 직전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본 게 마지막이니 2년 조금 넘은 것 같다.
샴:세월이 참 빠르다. 그리고 코로나가 우리 삶을 이렇게 바꿔놓은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디지털 시대 이전 같으면 이런 전염병이 인류를 덮쳤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거다.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라인 미팅이나 협업 툴이 있으니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이렇게 삶과 일을 지속해나갈 수 있지 않나?
이: 공감한다. 이제야 조금씩 사람들이 오피스로 돌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새로운 세상이 된 것 같긴 하다. 그도 그렇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디자인 CVP(총괄부사장) 자리에서 은퇴한 지금의 느낌은 어떠한가?
샴: 이제는 다음 제품 출시 혹은 업데이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몇십 년 만에 여유를 갖고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게 돼서 좋다. 내 링크드인 프로필도 ‘Flâneur Experience Designer’로 유머러스하게 바꿔놓았는데, 프랑스어 플라뇌르(Flâneur: 산책, 산책하는 사람)가 뜻하는 바가 좋아서다. 이 단어처럼 현재는 한 발짝 떨어져서 급하지 않게 무언가를 즐기는 여유를 갖고자 한다.
이: 지금은 여유를 말하지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의 삶은 정말 바쁜 일상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디자인 헤드로서 오랜 기간 지내며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프로덕트의 디자인을 진두지휘했다. 또 마이크로소프트에 오기 전에는 나이키에 오랜 시간 몸담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후배 디자이너가 당신의 커리어를 궁금해할 텐데, 하나씩 이야기해보자. 나이키에선 어떤 일을 했나?
샴: 나이키에서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일종의 프로덕트 이노베이션, 즉 새로운 형태의 접근법을 선보이고 이를 담은 제품들을 제시하는 팀을 이끌었다.
이: 나이키 하면 그때도 지금도 이노베이션의 상징과 같은 곳인데, 기억에 남는 프로덕트가 있다면?
샴: 나이키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뿐 아니라 문화와 연결의 힘을 믿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는 경험을 향상하는 작업을 맡았다. 개인적으로도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는데, 그저 진부하게 달리는 것만큼 고역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달리기를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했고, 달리기를 할 때 음악을 들으면 어떨까 하는 데로 생각이 미쳤다. 그 당시에는 워크맨이나 CD플레이어가 걷기만 해도 튕겨서 듣지 못할 수준이었고, 몇 곡 담을 수도 없어 운동을 하며 음악을 듣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MP3라는 것이 세상에 나왔다. MP3는 가벼운 데다 중간에 튕기지도 않았다. 음악을 듣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해준 것이다. 여기서 가능성을 발견해 세계 최초로 러닝을 위한 MP3를 만들었다. 이를 기점으로 운동을 하며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다양한 운동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해 사용자들에게 운동의 즐거움과 모티베이션을 줄 수 있는 여러 프로덕트를 출시했다.
이: 당시 나왔던 퓨얼밴드 같은 것들 말인가? 그때는 정말 혁신적인 웨어러블 기기였다고 생각한다.
샴: 정확하다. 이들 모두 핏비트(FitBit)이나 애플워치(Apple Watch) 등이 등장하기 훨씬 전이었다. 또 기술과 문화 디자인이 합쳐졌기에 나올 수 있었던 제품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나이키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 이직하게 되었나?
샴: 나이키에서 여러 일을 하던 중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서 마이크로소프트가 디자인과 컨슈머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파이오니어 스퀘어 스튜디오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이키에서 스포츠와 테크놀로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어떻게 하면 더 근원적인 기술들을 활용해 훨씬 더 큰 스케일의 일을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이 디자인 스튜디오가 속한 그룹은 ‘엔터테인먼트 & 디바이스’라는 그룹이었는데, 여기에 속한 팀들이 엑스박스(Xbox)와 모바일기기 등이었다. 특히 아이폰을 시작으로 스마트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던 때라 마이크로소프트로 옮기게 되었다.
이: 그렇다.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모바일 시대의 개막이었다.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이 쏟아져 나오고 거대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OS 경쟁에 나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당신도 윈도즈폰의 디자인을 책임지는 헤드이지 않았나?
샴: 그렇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가 급성장하기 시작했지만, 당시만 해도 윈도즈폰은 스마트폰이라기보다는 컴퓨터를 작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 블랙베리가 장악하고 있던 시장도 엄청났다. 특히 경험 측면에서 키보드가 스크린 밑에 붙어 있는 그들의 시그니처 디자인에 많은 사람이 익숙해져 있던 상태기도 했다. 디자인, 특히 이 경험 디자인이라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데, 새로운 기능을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험을 사람들이 어떻게 바꾸게 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그 당시 아이폰이 대단한 것이 블랙베리 스타일의 경험에 익숙한 사람들을 터치와 스와이프, 핀치 같은 새로운 UX(사용자경험)로 넘어오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로 디지털 디자인에는 다양한 움직임과 디테일 등이 추가되면서 단순히 멈춰 있는 하이퍼링크들이 아니라 살아 있고 움직이는, 무언가와 교감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 그렇다. 사용자와 디바이스가 인터렉션하게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경험이 펼쳐지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샴: 윈도즈폰을 처음 만들 때도 이러한 진화를 담아낸 디자인 시스템이 필요했다. 상인, 네가 디자인 시스템의 전문가인 만큼 이것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이: 프로덕트의 전체적인 맥락을 유지하고 스케일러블(scalable)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디자인 시스템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생각한다.
샴: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 윈도즈폰을 만들 때 ‘에어포트(Airport)’라는 이름의 디자인 시스템을 적용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디자인 작업이 공항의 규격화된 아이콘이나 정보처리 그래픽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팀 모두 뉴욕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가 만든 뉴욕 지하철을 위한 그래픽 스탠더드 매뉴얼(Graphics Standards Manual)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을 발전시키고 이를 ‘매트로(Metro) 디자인 랭귀지’라 이름 붙였다. 하루에도 수백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지하철의 시각디자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타임리스(Timeless), 즉 유행을 타지 않는 단단한 디자인이 필수다. 지하철 정거장 한 곳에서 본 그래픽을 다른 곳에도 어렵지 않게 적용할 수 있듯이, 만드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 모두 자연스럽고 일관되게 인지할 수 있는 타임리스한 디자인을 윈도즈폰에 적용하고 싶었다.
이: 메트로 디자인 랭귀지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혁신적이고 모던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윈도나 다양한 마이크로소프트 프로덕트에 그 디자인의 DNA가 남아 있지 않나?
샴: 생각하면 재미있는 추억이기도 한데 ‘스퀴어모피즘(skeumorphism)’이라고 하는, 보이는 사물을 그대로 묘사한 디자인이 당시에는 대세였다. 계산기 앱은 계산기 모양을 충실히 닮은 일러스트형 아이콘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실제와 닮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디지털 환경에서 보는 기호들은 대부분 시각적 은유다. 윈도에 있는 쓰레기통 모양의 아이콘은 사용자가 필요 없어진 데이터 파일을 삭제하는 창구일 뿐 사용자가 실제로 쓰레기를 모아 재활용하거나 버리는 공간이 아니다. 사물의 실제 형태보다 그 안에 담고 있는 뜻을 전 세계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형태의 시각적 메타포로 활용하고자 했다. 마치 올림픽 픽토그램처럼 말이다.
이: 빌 게이츠가 한 인터뷰에서 윈도즈폰을 중단한 것이 본인이 한 결정 중에 가장 후회되는 결정이라고 말한 것을 보았다. 이를 기점으로 애플과 안드로이드가 모바일 OS 시장을 양분했기 때문인데, 아쉽지 않았나?
샴: 그렇다. 디자이너로서 그 어떠한 후회도 없지만, 가장 큰 배움을 얻은 계기가 아닌가 싶다. 디자인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을 BXT라 부른다. 프로덕트는 비즈니스, 익스피리언스, 테크놀러지, 이 세 가지가 하모니를 이루며 발맞춰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들 수 있지만, 이를 누구도 알지 못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 프로덕트다. 혹은 사용성 좋은 디자인을 실제로 구현할 수 없거나 스케일러블하게 확장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실패한 프로덕트다.
이: 당신은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윈도 같은 프로덕트의 디자인을 오랜 기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어떤 점을 염두에 두며 디자인을 리드하나?
샴: 사용자를 제대로 이해한 디자인이 중요한데, 윈도의 경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이 언제나 한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서피스(Surface) 랩톱의 등장이 큰 영향을 받은 프로덕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스크린터치와 펜, 키보드까지 다양한 형태의 인터렉션이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멀티 모토(Multi Moto)라고 부르는데, 플랫폼을 넘어 사람들의 경험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 사용자의 경험이 모바일에서 데스크톱 환경으로 이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그저 커다란 스크린만 모니터에 띄워주면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각의 플랫폼에서 기대하는 경험이 다르다. 같은 기능이라고 해도 이를 어떻게 디스플레이에 띄우고 반응하게 할지 다양한 고민을 하고 리서치를 거쳐 디자인해야 한다. 또 작은 디자인적 변화 하나가 어떤 이들에게는 큰 어려움으로 느껴질 수 있다. 윈도 내에 어떤 기능이 있던 자리나 모양이 바뀌어야 할 때 적정한 기준과 방향성을 사용자들에게 제시하고 설득해낼지도 많이 고민해야 한다.
이: 디자이너로서 세계 최고의 커리어를 쌓았고, 이제는 잠시 쉬어가는 단계에 이른 것 같다. 이제 여유를 갖고 쉬겠다고 했지만 무언가 다른 회로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을 것 같은데, 준비 중인 다른 계획이 있나?
샴: 사실 스탠퍼드(Stanford) 디자인 스쿨과 뉴욕의 SVA(School of Visual Arts) 등에서 학생들에게 리스판서블 디자인(Responsible Design)을 가르치기로 했다.
이: 리스판서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샴: 앞서 우리가 만나자마자 세상이 참 빠르게 바뀐다는 말을 했다. 내가 처음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도 지금 같은 세상이 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폭과 속도는 인공지능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다음 세대의 디자이너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한 행동이 부정적인 결과로 사회에 돌아올 수 있는데, 디자이너들이 무언가를 만들 때 의식을 갖고 책임감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로 리스판서블(책임감 있는) 디자인이다.
이: 정말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디자인 교육이 현장과 괴리가 있는 데는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말씀하셨듯이 관념적·철학적인 면이 부족한 것도 원인인 것 같다. 당신처럼 오랜 기간 현업에서 디자이너이자 리더로서 쌓은 값진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어 기쁘고 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