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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원 Oct 24. 2019

디자인과 과학

머리로 이해하는 디자인

디자인과 과학이라. 디자인, 특히 산업 디자인의 학문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슨 어색한 소리냐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디자인을 과학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노력은 사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전세계 디자인 연구자들이 고민했던, 잡힐듯 잡힐듯 하나 멀어 보이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디자인이 무엇을 의미하냐를 응당 짚고 넘어가야 하겠으나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사실 디자인의 정의만큼 미스테리하게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는데 의미없이 끝난 것이 없다. 최근 한 핀란드 교수가 알려 준 디자인의 정의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 이다. 무려 전미 기계공학자협회 회원들의 밤샘 토론끝에 나온 것이라는데, 뭔가 심오한 뜻이 있을 줄 알았으나 그 분 표현을 빌리면 "이게 무슨 쓸모가 있었는지" 모르겠단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왜 이렇게 디자인은 과학에 끝없는 짝사랑을 보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의외로 간단한데 불과 수 십년 동안 과학이 인류에 끼친 지대한 능력 - 암을 치료하고, 행성을 탐사하고, 컴퓨터가 인간과 대화하는 - 을 눈앞에서 목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컴퓨터 공학 수업에서 정렬 알고리즘을 처음 배울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무작위로 있는 한 줄의 사람들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한다고 생각해보자.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정리되어 있지 않은 학생 중 가장 이름이 빨리 돌아오는 사람을 골라 정리된 줄의 가장 끝에 세우는 것을 반복하면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집단으로 나누어 순서를 정리하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앞뒤 두명씩, 다음에는 연속되는 2명 그룹을 모아 4명씩, 다음은 8명씩 정렬을 하는 것이다. 무슨 차이일까 싶지만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 방법보다 시간이 덜 걸리며 그 차이는 학생 수가 많을 수록 급격히 커진다. 이와 같은 계산 이론이 전쟁에 적용되었다 생각해 보면, 열등한 이론을 가진 쪽은 그야말로 영문도 모르고 백전백패이다.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오늘날 국가 경쟁력이 이에 달렸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 뒤에는 지식의 생산과 전파 및 확장, 그리고 재생산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오랜 시행 착오를 통해 문제를 탐구한다. 그 끝에 드디어 '작동'하는 결과를 얻게 되면 학술 논문과 같은 활자로 된 형식으로 내용을 전파한다. 이 텍스트는 결과를 재현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포함하며 다른 연구자들은 이 위에 관련된 여러 다른 결과들을 생산, 축적한다. (이런 면에서 연구는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도 이미 존재하는 것의 반복일 경우 '0'의 가치를 갖는다) 디자인이 이러한 과학적 프로세스를 거칠 수 없을까, 그리하여 시행착오를 줄이고 질을 향상하며 궁극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 과학화의 요지라고 할 수 있겠다. 디자인이 과거를 기억하고 논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진보적인가', 혹은 '비교 가능한가' 등의 측면을 생각해보면 과학적 지식의 축적과는 그 성격이 여러모로 다르다.


그렇다면 이와 대비되는 디자인 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전통적 의미에서 디자인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시 현실의 작품으로 나타나는 창작 활동이다. 디자이너는 유, 무형의 아티팩트를 세상에 실현함으로써 공공성 혹은 기업의 이윤 등에 기여 한다. 기능적으로 잘 디자인 된 의자, seamless한 앱의 UX, 삶을 풍요롭게 하는 주거 시설 등이 주는 이득은 과학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직접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반복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바로 디자이너 개인의 "창의적" 역량이다. 과학이라고 개인의 능력이 중요하지 않고 창의적 해결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자인 결과물의 공과를 따질 때 우리는 과학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개인의 창조적 특질에 주목한다. 정말로 시쳇말처럼 디자인은 창의성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창의성 높은 작업을 디자인이라 부르는걸까?) 정녕 디자인의 자유도는 과학의 자유도보다 더 높은 것일까?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는 것 같은 무지한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교육에서 어느 정도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필자는 대학 입학 후 설계 기초시간의 막막함을 잊을 수 없다. 연필로 기다란 줄을 얼마나 깔끔하게 그릴 수 있냐 하는 지루한 제도 수업이 지난 후 처음으로 맞는 건축 설계시간. 교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커피를 연신 들이키며 찡그린 얼굴로 학생이 가져 온 폼보드 모델을 들여다보고 있다. 밤새 고민은 하였으나 별 볼일 없는 결과를 가져온 학생은 어떻게 면피를 할까 고민하고 있다 (전문 용어로 '번트' 라고 한다). 마침내 터져 나온 교수님의 말.. "왜 이렇게 했나?" "음.. 네 그것은 말이지요.." 이것이 몇 번 오락가락하다보면 호되게 질책당하기도 하고, 어쩌다 홈런을 치기도 하고, 괜시리 특정 학생만 더 잘해주시는 것 같다 원망하다보면, 서서히 교수님 성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선문답에 대한 감을 어렴풋이 잡게될 때 즈음 어느 새 졸업이다. 다음 예제를 통해 이 학생의 당황스러움을 공감해보자.

미스 반 데어 로에, IIT 건물

위 건물은 위대한 모더니즘 건축의 찬란한 정수이다. 자~ 뭐가 보이는가? 설마 우리나라 아파트마냥 성냥갑 같이 생긴 철과 유리로 된 박스가 보이는 건 아닌지? 음. 한 번 찬찬히 뜯어보자. 진입로를 보니 낮고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어디서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는지? 바로 신전 포디움, 기단이 이렇게 생겼다. 즉, 우리는 이 건물을 올라가면서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마치 우리를 압도할 작품을 마주할 기대를 하면서. 검은 지붕은 어떤가? 검은 철제로 된 두꺼운 판형이 보이는데 이를 받치는 기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우 가느다랗고 긴 비례를 가졌으며 특히 주두 부분 (기둥과 지붕이 접합하는 곳)은 더 얇아 마치 이쑤시개와 같다. 사실 이런 접합부분을 그냥 원래 기둥 두께대로 붙여버리면 마치 '떡'진 것처럼 되어 경쾌한 느낌이 살지 않기에 이러한 기법을 많이 쓴다. 육중한 판을 이런 이쑤시개가 받치고 있는 것은 철이라는 재료에 대한 찬사이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외피는 온통 유리로 덮여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건물 뒤까지 모두 투명하게 보여서 건물의 두께로 인한 물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로 들어가면 이러한 공간이 하나로 뻥 뚫려 있는데 이는 유니버설 스페이스 - 그 무엇으로도 쓰임이 가능한 비어있는 공간 - 라는 위대한 개념의 실현이다. 많은 유명한 건물이 그렇듯 그 사용성은 또 다른 문제이다. 유리로 둘러 싼 커다란 무주 공간은 음향/열/환기 등 측면에서 매우 비효율적이며 무엇보다 유명세 때문에 불쑥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외부인들 때문에 거주인들은 사실 매우 괴로울 것이다. 이런 설명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잘 몰랐다고. 괜찮다. 이러한 미학을 배우지 않고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 2016 통합디자인스튜디오 과목, 곽민지/김가영/윤희우/이강경 팀 작품


필자가 교편을 잡게 된 후에는 제품디자인, 시각디자인 교수님들과 공동으로 크리틱을 하는 경험을 통해 산업디자인에도 이와 비슷한 프로세스가 다른 분야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위의 학생 작품을 보자. 학생이 중간 과정으로 가져 온 로고 디자인인들데 교수는 저 많은 수의 결과물 중에서 하나를 골라 더 발전시킬 것을 주문했다. 여기를 좀 더 이 부분을 키우고, 색깔을 이렇게 바꾸고 등의 주문이 이어지는데 그닥 시각디자인에 보는 눈이 없는 필자도 '아! 정말로 그러면 좋겠다' 고 탄식하게 된다. 학생들은 이에 수긍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나 사실 그 권위에 도전할 방도는 달리 없다. 교수가 보는 것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수의 의지도 "학생이 가져온 결과"에 한정된다는 측면에서 학생에게 의존한다. 교수가 같은 인풋을 주더라도 학생이 가져오는 결과물은 좀 과장을 보태서 천지차이이기도 하다. 디자인 수업은 이런 면에서 교수와 학생의 공동 작업이다.  

 

과학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교수는 방대한 학계의 이론 중에서 학설로 정립된 것들 중 꼭 알아야 될 것을 고르고 골라 제한된 시간 내에 최대한 쏟아 놓는다. 과학적 사고의 기반이 되는 논증 체계 내에서 대개는 명확히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여러 모델들이 제시된다. 게임의 기준은 심플하기 그지 없어서, 경험이 일천한 학생일지라도 교수보다 더 좋은 코드를 짜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구글의 인사 체계가 괜히 수평적인게 아니다) 또한 교수법에 따라 학생의 이해도의 편차를 상당히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핵심적 차이는 디자인 교육의 목표는 "매우 사적인 철학과 기예를 갈고 닦는 것"이라면, 과학의 그것은 "체계화된 지식을 습득하여 더 높은 문제에 대한 총알을 준비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고등교육의 역사에서"예술대학"이 "종합대학"의 일부가 된 것이 얼마 안 된다. 현재도 미국이나 유럽의 디자인/예술 관련 대학들 중 종합대학이 아닌 곳이 아직 차고 넘친다.


그런데, 디자인이 꼭 이렇게 개인마다 다르기만 한 건 아니다. 필자는 위의 로고 발전시키는 프로세스가 너무 신기해서 저 위의 로고 그림을 가지고 기업과 대학의 특강을 돌아다니며 물어보았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떤 안이 제일 좋으신가요?" 그런데 답변이 놀랍게도, 매우 일관되게 한 가지로 수렴하였다 (무엇일지 맞춰보시라). 그렇다, 그렇게도 다양한 미학적 평가 기준 사이에서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판단하는 "객관적으로" 좋은 디자인이란 존재한다! 여기서 디자인 과학이 나아갈 앞날이 살짝 엿보인다. 과연 정량적인 디자인 평가 기준이란 존재하며, 이를 이론화시키고 보다 나은 디자인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까? 과학적 지식처럼 체계화하고 전달할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 한계 밖이 진정한 창의의 영역이라면, 디자인이 타 분야에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디자인은 자격 지심이 많다. 전통적으로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서 그 작동 구조가 다 완성된 후 "껍데기"를 포장하는 역할에 그친다고 생각한다. 그러 이 사실을 살짝 뒤집어보면 공학/경영자들 속에서 매우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S전자에서 땅개 엔지니어로 십수년을 박박기던 필자의 친구는 고위직으로 순식간에 영전한 디자이너의 스토리를 듣고 "야! 아니 디자이너는 왜 그리 승진이 빠른거냐?" 고 불만을 쏟아내었다. 엔지니어는 디자이너에 비해 그 수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회사 뿐만 아니라 대학교의 정원 수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에 비해 디자인은 적어도 엔지니어링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소비자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더 나은 "껍데기"를 만드는 체계적인 이론을 구축하려는 노력은, 실패할지라도 가치가 있다. 사실 내부에서 그리하지 않더라도 외부에서는 '디자인'이라는 블랙박스를 해체하고자 하는 노력에 여념이 없다. 한번 내부자-빈 캔버스를 두고 머리를 쥐어 뜯어 본 사람-의 입장에서 디자인 연구가 쌓아 온 과학을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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