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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원 Aug 10. 2024

명예, 인기, 그리고 초심

2024년 올림픽은 새로운 관전 포인트를 보여준다. 인간의 극한의 정신적, 신체적 아름다움이라는 본 의미를 넘어서서, 흥행과 수익이라는 피치못할 목적을 위해 소위 '손에 땀을 쥐는' 승부를 경험토록 규정이 진화한 것이다. 양궁, 사격과 같은 종목에서 이를 유감없이 확인하였는데 필자는 사격 25m에서 하마터면 간이 떨어질 뻔 했다. 최종 금메달 결정전에서 프랑스 선수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 없었기 때문인데, 슛아웃이 되면서 그 쿵쾅대는 가슴이 TV 중계 화면으로까지 보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선수는 거의 돌부처에 가까웠다. 그녀는 후속 인터뷰에서 "그 프랑스 선수가 더 떨렸겠지요" 라며 폭발하는 심장을 다스리는 비결을 알려주었다.

 

프랑스 선수는 영웅이 되기 위한 딱 두발이 모자라, 결국 슛아웃까지 간 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궁금했던 건 도대체 왜 우리는 그 순간에서 가슴이 콩닥거리느냐이다. 당연히 그간의 극한의 정신+신체적 인내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목표를 위해 온갖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훈련에 매진했던 결실을 이루느냐 마느냐가 바로 이 한 발에 달렸다. 과연 세계 최고라는 영광의 신전에 들어가 유명세와 존경을 누리느냐, 아니면 그저 하나의 필부로 스러지느냐의 문제이다. 내가 그것을 누릴 가치나 자격이 있느냐는 둘째치고 내가 버티는 동안 저 경쟁자가 나가 떨어져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 다 이런 순간을 겪었다. 입시의 그 간절함과 떨림이 기억나시는지! 결승전의 선수처럼, 그간의 삶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인양 짓누르는 압박감을 애써 외면하며 루틴이 치고 올라오기를 바랬다. 입사 인터뷰에서도 우리는 간절한 마음을 들킬 수록 더 확률이 낮아짐을 알고 있다. '난 니들이 뽑건 말건 상관없다'라고 되뇌이건만 불쑥불쑥 행동을 지배하는 감성을 어찌할 수가 없다. 천신만고 끝에 승기를 잡고 끝내기 직전, '상금으로 뭘할까?' 라는 생각이 튀어나올 때 승부의 추가 기울어질 뻔했다는 바둑 기사도 있다. 군대 면제라는 특혜에 눈이 멀 때, 우승이 코앞에서 어른거릴 때, 생각은 미래로 건너뛰고 근육이 말을 듣지 않으며 공은 글러브를 튕겨 나간다. 


최고의 집중력이 필요할 때 잿밥(?)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흐려놓는다. 그러나 '초심을 잃었다' 라는 힐난에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으랴. 학계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학문이 즐거워요'라는 연구자들조차 당연히 최고의 영광과 유명세를 꿈꾼다. 라이프니츠의 미분법, 힐베르트의 상대성이론, 월리스의 진화론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byline에 대한, 더 나아가 불멸에 대한 욕구는 그만큼 인간에게 근본적인가 보다. 그러면 도대체 이를 어찌해야 할까. 활활타는 욕망에 데이며 자신을 채찍질해야하나, 아니면 애써 나를 속이며 그 때가 오기를 힐끗거려야 할까. '승리는 어제 내린 비' 라는 퍼거슨 경의,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싶다'는 임윤찬의 경지는 과연 가능키나 한건가.   

 

중학생 한 명이 디자인에 대해 궁금하다며 인터뷰를 하러 온 때가 있었다. 아마 수행평가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질문들을 귀여워하며 신나게 거들먹거렸다. 마지막 질문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나요 잘하는 것을 해야 하나요?'였다. 별 생각없이 나온 내 대답은 아마도 '좋아하는거 하다보면 잘하는 걸 하고 있는 걸 발견한다' 였던 것 같다. 무심히 주섬주섬 챙기며 나가는 학생을 배웅하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지금 다시 묻는다면 차라리 '아는 자보다 좋아하는 자가, 그보다는 즐기는 자가 더 고수다' 정도로 말해주지 않을까. 내가 지금 나의 소중한 시간을 쪼개 이 글을 쓰는 건, 그 끝에 있을 천금보다 이유를 알 길이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이 가장 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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