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원 Nov 24. 2024

디자이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디자이너는 뭘 하는 사람일까. 기능과 철학에 따라 공간을 구성하는 건축가. 기업의 브랜드를 구축하는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감성과 트렌드에 민감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공공 디자인을 관리하는 공무원. 가전이나 자동차 기업의 인하우스 디자이너. 좀 멀게는 컨설턴트나 법률가로 활약하는 경우도 있으며 디자이너가 공공정책에 깊숙히 관여하는 국가도 있다. 매우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우리가 눈을 뜨고 일어나서 보이는 모든 것이 누군가가 디자인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특기할 것은 이런 직종을 어디에서 누가 가르치냐는 것인데 만일 몸으로 체득하는 미적 활동이 강조된다면 미술대학으로, 보다 큰 규모의 산업에 속한 활동으로 본다면 - 건축이나 의류처럼 - 별도의 학과로 편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이라는 그럴듯한 범주에 속한 것에는 다들 동의하는 편이어서 디자이너의 정의와 역할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당연하게도 이를 규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정보 이론의 아버지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Herbert Simon도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에피소드를 남겼는데, 그는 건축학 전공 학생들을 가르쳐 본 후 다음과 같이 툴툴거렸다. "나는 교사라기보다는 선교사 같았는데, 관대한 이교도들이 아닌 다른 신앙의 광신도들에게 설교하는 느낌이었다" [1].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만난 광신도들이란 1940년대 Mies에 의해 세뇌된 IIT 학생이었으니 신천지 교인과 다를 바 없었을게다. 그리고 그는 세상 심심한, 그러나 디자인 연구자들이 영원히 무시할 수 없는 디자이너의 정의를 남겼다. "[e]veryone designs who devises courses of action aimed at chaging existing situations into preferred ones" 

  



나름 오래 세상을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는데 자신만의 위키 페이지가 있는 명망있는 사람을 가까이 마주할 때가 그렇다. 국내 인사야 가끔씩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쳐도 -- 지인이 굴지 기업의 사장단, 용산, 그리고 국정감사까지 등장했다-- 해외 인사는 정말 확률이 낮다. 그러던 중 학과 한 교수님의 지도교수께서 한국에 출몰하셨으니 Ezio Manzini [2] 라는 분으로 사회 혁신을 위한 디자인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이탈리아 국적의 세계적인 연구자이다. 개인적으로야 오래 연구한 주제이시겠지만 지속 가능성은 그야말로 잭팟이 터진 것과 다름이 없다. 이외에 사회 혁신, 즉 사회를 움직이는 디자인이라는 주제는 모르긴 몰라도 이탈리아, 특히 북부 지방 디자인의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쥬세페 떼라니라는, 파시즘에 이념적 기반을 둔 건축가 또한 Manzini 교수님과 같은 밀라노 공대 출신이었고 (렌조 피아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가 우리나라에 대해 가진 궁금한 점이 그랬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는 왜 한국의 캐릭터들이 그렇게 '귀여운'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느냐, 한국의 무엇이 그런 문화적 소프트파워를 가지게 만들었느냐 (중국이 가장 부러워 한단다), 그리고 왜 봉준호의 영화는 메세지가 없는 (것 같으)냐 하는 것이다. 장르가 코메디라서..


2024 서울디자인어워드 수상작들. 지역 주민을 위한, 주민에 의한 프로젝트들이 많다. [3]


사회적 디자인에 관한 그의 강의 중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Simon의 디자인 정의 중 가장 첫 부분, 'everyone', 즉 누구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심사한 서울 디자인 어워드 사례를 들었는데, 인도의 의료가 취약한 지역을 위한 실명 예방 안구검사기, 에티오피아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나올 이유를 주는 플래쉬 충전기, 캄보디아의 범람하는 강 위에서 안정적인 농작물 경작을 가능케 하는 부레 옥잠 수상 텃밭, 에콰도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거주지를 보호하는 짚과 나무로 만든 수공예 센터이다 [3]. (이런 훌륭한 사례들이. 서울시 홍보팀은 일을 안 하나요?) 이와는 사뭇 다른 사례로 우버와 에어비엔비를 들었다. 이것들 또한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누려는, 아래로부터의 변화인 것은 틀림없었으나 거대 자본과 결합하면서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현재 유럽에 끼치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는데, 예를 들어 에어비엔비는 도심에 사는 거주자들을 죄다 몰아내고 관광객들로 가득차게 만들어 공동화와 슬럼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서비스 하나가 블라블라카라는 것을 알려 주었는데 우버의 대체제로서 일정시간 드라이버로 일한 사람은 꼭 고객이 되어야 한다든가, 1인 승객은 뒷자리가 아닌 앞자리에 앉아야 된다든가 하는 룰을 통해 고객과 제공자 간의 평등을 중시하는 것이란다. Manzini 교수는,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또 경고한 기온 상승의 레드라인을 훌쩍 넘어선 이 암울한 상황에서조차, 디자이너들이 포기하지 말고 사회 변화를 향한 역할을 주도할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비관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건 아무래도 떨칠 수 없었으니, 결국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 (1) 우리는 스스로 만든 위기에 멸망을 앞둔 공룡과 같은 바보 같은 존재 아닌가, (2) 내 마음 속의 악마와 천사가 싸우고 있는 느낌인데, 디자이너는 도대체 자본주의와 화해할 방법이 있는건가?" 어쩌면 경쟁이 극한으로 치닫는 오늘 사회에서 생존에 헉헉대는 디자이너들에게 사치스러운 이야기 아니냐는 말이다. Manzini 교수는 익숙한 질문인 듯 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답을 주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 본 사례들은 꿈꾸던 누군가의 행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러분들 르 꼬르뷔제라는 건축가를 아시는지 모르겠다. 그가 남긴 '빛나는 도시'안은 당시에 폭력적인 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현재 그의 꿈이 실현된 도시들이 있다. 어느 순간 정치인들은 새 비전을 찾아 헤맬 것이고, 디자이너가 꾼 꿈은 선택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꼬르뷔제의 300만 거주자를 위한 현대도시 계획안

 

빛나는 도시라. 내가 기억하는 꼬르뷔제의 꿈은 마천루와 같은 거주지가 드문드문 솟아있는 사이로 도로가 나 있고 무엇보다 드넓은 공공 공간이 있어 사람들이 이를 누릴 수 있는 도시이다. 꼬르뷔제가 빌딩같은 공동주택이라면 세계에 둘째라면 서러운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무슨 말을 했을까. '이렇게 된 이유야 어쨌든 대충 비슷하긴 하다'라고 했을까. 아니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라고 했을까. 강의가 끝나고 나에게 다가 온 Manzini 교수는 "(우리는)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공룡이 되지 않을까" 라고 말을 해 주었다. 당시에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돌아보니 미래의 기술을 누리는 인간의 모습을 말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의 한없는 적응력을 믿는, 근본적으로는 낙관주의자였다. 그럼에도 하나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으니, 도대체 왜 세상을 바꿀 꿈을 디자이너보고 꾸라고 하는 걸까.   




1950년대 몬트리올 맥길대학에서 두 명의 연구자는 쥐의 뇌 여러 곳에 스위치를 연결하고 어떤 곳에 자극을 받기를 원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를 관찰했다 [4]. 한 시간에 5000번까지 최장 24시간동안 쥐들이 눌러대는 곳을 발견하였으니, 바로 우리가 나중에 도파민이라 부르는 것이 분비되는 곳이 되시겠다. 우리 뇌의 100분의 1의 100분의 1만큼 작은 영역을 차지하면서도 한 세포당 거의 수백만 뉴런과 연결된 곳이라고 하니, 동물들을 특정 행동을 하도록 강화, 유도하는 콘트롤센터라해도 과장이 아닌 듯 하다. 이러한 생리학적 연구는 심리학적 관점과 더불어 컴퓨터 과학으로까지 흘러들어가는데, 무작위적 탐색과 적정한 보상을 통해 바둑과 같은 작업을 잘하도록 성공적으로 가르친 강화학습은 현재 (비)지도학습과 더불어 인공지능 모델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다. 


 신경과학과 컴퓨터과학의 지속된 교류는 서로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되는데, 도파민의 분배를 실시간으로 관측이 가능해졌을 때의 일이다. 원숭이에게 과일이 줄 때를 관찰하니 (당연하게도) 뇌에서는 순간적으로 강한 도파민의 급증이 관찰되었다. 신기한 건 이후의 일로 실제 과일을 먹을 때에는 도파민의 증가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더구나 과일을 준다는 가짜 신호를 주었을 때에는 제로에 가까운 분배량을 보인 것이다. 이는 도파민을 어떤 심리적 반응 -예측, 놀람, 주목 등-으로 해석하기에 상당히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인공지능학자들은 여러 보상 메커니즘을 시험하다가 예측값을 지속적으로 조정하는 모델(Temporal Difference Model)을 발견하였는데, 이에 실마리를 얻은 신경과학자들은 이는 결국 실제 원숭이에서 분배되는 도파민이 보상 그 자체가 아니라 보상에 대한 예측치를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날 때 쾌락을 느끼거나 우울해 지는 것이다. (아 인간은 정말 오묘한 존재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lxxg9JM5tY

Montezuma's Revenge - Atari 2600 외적보상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 예시이다


거꾸로 인공지능이 풀지 못한 문제에는 한 Atari 게임이 있었다. 작은 실수는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극악의 게임에서는 연습을 아무리해도 보상을 얻어 뭘 배우는게 불가능했던 것. 실마리는 외적보상이 아닌 내적보상 - 호기심, 새로움, 놀람 등을 추구하려는 욕구 - 에서 나왔으니 바로 내가 보지 못한 화면을 보고자 하는 경향을 주입시켰을 때 빠르게 게임을 마스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이런 식의 행위 기반 학습은 너무 무섭다). TV의 치직거리는 화면을 중간에 넣었을 때 그것에 정신없이 빠지기도 했는데 끊임없이 새로운 비쥬얼에 눈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예 외적보상을 빼 버렸을 때도 너무 게임을 잘 했는데, 죽으면 다시 첨부터 해야 되는게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라고 ㅠㅠ. 도박 중독도 이런 상황-- 하우스에 의한 기대값, 외적 보상이 마이너스인데 확률적 미래를 보고자 하는 내적 보상이 더 큰 경우--이다. 

 

문득 디자이너의 고유한 영역을 살펴보노라니 뭘 만드는 사람들이다. 즉 패턴을 읽어 규칙을 발견하는 데에서 그치는 과학자와 대조적으로, 어떠한 청사진이 실현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자신 만의 꿈을 꾸고 어필해야 한다. 자신만의 꿈이 아니라면, 대중들의 숨겨진 욕구를 발굴해서 그것이 충족되야 함을 일깨우는 선동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 때 그 때 디자인이 요구하는 상황은 모두 달라서, 같은 룰이 적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그런 창작의 고통을 즐겨야만 한다.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는 사회에서 또 다른 원리를 가졌다고 한다면 너무 과장일런지. 디자이너가 돈을 벌 수는 있겠으나, 수완있는 사업가가 위대한 디자이너라 불린 경우는 없었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가 담을 수 있는 세계보다 크므로,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나 공모 요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향한 씨앗을 뿌린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하기도 하고, 특정한 재료에 천착하기도 하며, status quo를 도전하는 새로운 전형을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에게 최대의 보상은 디자인에 대한 금전적 댓가가 아니라 바로 꿈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적 동기가 없을 수 있음을 어느 정도 각오한, 내적 동기에 충만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 Manzini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에 디자이너가 적합하다고 한 것은 아닐런지. Simon이 이야기한 '더 선호하는 상태로 만드는 행동의 과정을 설계하는 자들'이라는 정의도 사뭇 멋지게 다가온다.


기후의 모든 지표는 이제 우리의 삶을 최소한으로 유지할 수 있는 인류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고 가리키고 있다. 수천년 후 지구의 생명체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서 멸망한 이유를 알고 킥킥댈까봐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와중에 새로운 사피엔스의 수괴는 자본주의의 탐욕에 충실한 그 분이시다. 다시 한 번 회의가 밀려온다. 아니, 언제 공존과 공생이 우리를 구원한 적이 있던가. 경쟁과 탐욕과 죽음이 언제나 압도하는 승자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노년의 대가는 피라미같은 학과장에게 '다양한 비젼을 가진 학생들로 채울' 것을 당부했다. 디자이너들이여, 꿈꾸는 것을 멈추지 말자. 작은 실천이라고 주눅들지 말지어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1] Revisiting Herbert Simon's Science of Design DJ Huppatz 

[2] https://en.wikipedia.org/wiki/Ezio_Manzini

[3] http://www.seouldesignaward.or.kr/winners/2024[

[4] The Alignment Problem by Brian Christian 

작가의 이전글 색의 조화, 생성형 AI, 그리고 추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